소중한 나를 놓지 않으려 애쓰는 애처로움. 화려함 뒤의 덤덤함.
L책임, 여자친구라도 생겼어?
오늘 데이트라도 가는가보네 흐흐흐
다만 그게 아닌 경우가 늘 문제. 싫어하는 사람이 꼭 눈살을 찌푸리며 저딴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주변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이. 그럼 나도 그냥 "자기 관리 안되는 개저씨가 짖는구나" 생각하고 넘긴다. 다만, 그러다가도 가끔 생각의 걸음이 툭. 하고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다.
27살 신입 직원 때부터 쭉 옷에 대해 이래저래 말을 들어온 입장에선, 이젠 명확하게 칭찬과 시비가 구분이 간다. 초년생 때는 내가 너무 튀게 입었나(그래봐야 면바지를 접는 정도) 했는데.. 이젠 안다. 본인의 짜증을 푸는 가치 없는 신기루라는 걸.
그러고보니 27살에 입사할때부터 지금까지 쭉 들어온 말이다. 뭘 회사에 그렇게 꾸미고 오냐, 일엔 집중안하고 꾸미기나 하냐. (나이 먹으니 저런말은 적게 드는데, 어릴때 만난 아저씨들은 아직도 저런 말을 하고 앉았다. 아저씨들 회사에 등산복 입고 온다고 제가 뭐라 한적 있나요.. 왜들 그러셔 ㅎㅎ)
어딜 가도 딱히 흠 잡히거나 다투는 사람 없이, 그저 키만 크고 무난히 살아왔던 나. 그런 내가 직장인이 되며 전에 없이 능동적으로 유일하게 도전을 했던 부분이 하나 생겼다. 남들 눈치보지 않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누군가가 주식을 사고, 술을 마시고, 여행을 갈 때 나는 저축하고 남는 돈은 전부 옷에 썼다. 많이 입어봐야 내게 맞는 옷을 사회 초년생 시절에 빨리 세팅할 것 같았다. 그렇게 15년간 옷을 입어왔다.
옷. 정말 좋아한다. 옷 자체도, 옷 입은 내 모습도.
명품족도 아니고, 백화점에서 쓸어담진 않지만.
학생 시절 유럽 패션 블로그에서 보던 것처럼,
핏한 셔츠에 타이를 매는 포멀한 룩을 즐기기도 했고
컬러 치노를 접어 입고 쨍한 컬러의 양말에 다양한 구두를 신고
어깨 위에 가디건을 걸치는 위트를 발휘하는게 즐거웠다
더 어린 시절 일본 잡지(또는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오버사이즈 셔츠에 니트 타이를 매고
넉넉한 핏의 팬츠를 입고 부츠를 신었다
즐겨듣던 제이팝을 들으며 길을 거닐 때는
꼭 잡지 뽀빠이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즐겨보던 블로그와 패션 잡지의 주인공은 늘,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된 '어느정도 멋짐이 완성된' 남자들이었다. 20대의 나는 40대가 되면 스스로 '아저씨'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어릴때부터 제법 멋스럽고, 본인의 인생에 충실한 아저씨가 되는게 꿈이었다.
후줄근한 아저씨 말고, 뭔가 단단히 멋진 아저씨가 되어보고 싶었다.
적당히 사람들과의 관계(위트와 유머를 주고 받는)도 유지하면서
왠만큼 누구 못지 않게 깊고 진지한 이야기도 선호한다.
나름의 깊게 향유하는 음악적, 문학적, 영화적 취향도 있고
굳이 Gen-Z 컨텐츠를 따라잡지도 않고, 옛것을 고수하지도 않는다
포멀한 옷과 넉넉한 느낌의 핏 모두 즐기는 편이다.
락이나 힙합 외에는 왠만한 음악적 장르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좀- 이런 편, 저런 편이라는 “적당선”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을 부쩍 느끼는 편이라, 마음이 어려울 때가 많다. 다들 겪는 지나가는 시기겠지만, 요즘의 나는 나를 붙잡기 위해 애쓴다.
자꾸 내가 사라져간다. 이상하다. 나이가 들수록 단단하게 추구하는 바가 있었고, 막상 그 나이와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어느 정도 누리고 있다고 확신했는데.. 이 기분은 뭘까? 그보다 나는 누굴까?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남편(모든 스몰토크는 육아가 되었다. 싫은건 아니지만..)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부서가 바뀌면 내가 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겠지)
회사에서 술자리 모임이 거의 없는 사람. 취한 모습도 거의 본 적 없는.
알고보면 브런치에 글도 쓰고, 본인 옷만 올리는 인스타 계정이 있는 사람
키 크고, 옷 입는 걸 좋아하는 아저씨.
쌓아올린 많은 것들 중에서, 결국 나를 지탱하는 건 옷 아닐까?
오롯이, '나 자체로 평가받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의 어떤 부분은 처음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단단히 쌓아올려온 옷 뿐이라는 확신이 든다. 아무 조건도 없다. 유부남인데 뭐하러 차려 입냐고? 애 아빤데 어디 가서 뭘 기대하길래 옷을 잘 입냐고? 어차피 집-회사 출퇴근만 하는데 뭐하러 자기 관리를 하냐고?
나는 그냥 내가 좋아서 입고, 나를 위해서 입는다. 패셔니스타도 모델도 명품족도 아니지만, 40대 아저씨 중 한명으로 조용히 스러져가는 나를 잡아두기 위해서 나는 "굳건히" 옷을 입는다.
입고 싶은 옷을 잘 입기 위해서, 술과 안좋은 음식을 멀리하고, 운동과 생활 습관으로 몸을 관리한다. 스물일곱의 내가 바라던 40대의 내 모습을 '누가 몰라줘도 나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 옷을 산다. 주변의 누구의 어떤 존재, 내가 하는 뭔가가 아닌 오직 나라는 존재 하나를 스스로 기억하기 위해서.
깔끔하게 마음대로 잘 입고 길을 걷는 모습을, 오늘도 스스로 지켜보자. 약속, 잘 지키고 있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