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앞을 지키는 안내견도 함께
아침 출근 전철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꽉 차 있었다
자리에 앉는 것(또는 앉을만한 포지셔닝을 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하고,
오늘따라 평소에 서지 않는 노약자석 쪽 자리에 서게 되었다.
오늘도 여전히, 가을 날씨지만 전철은 덥구나.
브런치를 쓸지, 지난주에 빌려둔 E-book을 읽을지 고민하다
왠일로 단톡 동창방이 활기차게 떠들어서 몇마디 거들면서 자리를 잡고 서 있는데
슥-하고 무릎 옆으로 뭔가 지나간다
그리고 안내견을 의지한 시각장애인(이하 "그 분")이 타셨다.
예전에는 "장애우"라는 표현을 잠시 쓰기도 했는데,
"장애인"이라고 표현하는게 맞다는 것을 뉴스에서봤다.
"장애인"이 맞는 표현이니, 꼭 기억해두시길.
노약자 석 옆, 출입문이 있는 방향으로
안내견을 앉히시고 그 분은 옆에 서 게셨다(상당히 젊은 분).
- 당황할수록 차분해지는 내 성격, 이럴때 장점이 된다.
안내견이 문의 반을 가렸는데 어떡하지?
밟히지 않도록 몸으로 문 앞에서 바리케이트를 세워야겠다.
당장 두정거장만 가도 사람이 꽉 찰텐데 어떻게 하지?
다행히 반대쪽 문이 열릴테니, 미리 가까이 오는 분들에게 가이드해야겠다.
반대편 문과 경로석 쪽에 비스듬히 자리를 잡고 서 있는데,
노약자석의 어르신께서 일어나더니 자리를 양보하셨다.
근데 직접 말을 걸지 못하시고(아마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셨으리라),
그 분을 손으로 톡톡 쳐서 앉으라고 표현하셨다.
나는 침착하게 그분의 옆에 서서,
"자리 앉으시라고 하시네요."라고 전달하고,
자리에 앉을 때 아주 조금만 도와드렸다.
큰 동작으로 돕거나, 주변의 시선을 모으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손으로 노약자석 옆 투명한 벽을 짚고, 조심스레 자리에 앉고는
안내견을 자신의 무릎 중심에 오도록 앉힌다.
안내견은 주인의 무릎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그 분은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의자 앞으로 안내견의 머리와 앞다리가 노출되어 있고,
꼬리와 뒷 다리의 일부가 좌석 옆(문 앞)으로 노출되어 있어 밟힐 위험성이 있다.
다행히도,
문 앞에 선 젊은 여성분이 안내견의 다리를 피해서(조금은 사람들의 동선을 가리도록) 서 계시고,
나는 안내견의 머리와 앞 다리를 막게 섰다.
사실, 나는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솔직히 조금 경계한다.
목줄을 풀고 다니는 견주 등 "일부 예의없는 견주"들의 행동에
다소 질려있던 상태라 어릴때처럼 마음껏 예뻐하지는 않는.
두 정거장을 더 가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나는 짐짓 어깨와 손으로
그 분이 인식하지 못하게 '여기 조심하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다행히 옆자리에 서 계신 여성분도 같이 주의를 주고 있었다.
만원 전철에서 뭐랄까-
딱 "이만큼"의 공간을 지켜내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알던 사람을,
친구를 돕는 마음으로 하나되어.
그렇게 서 있는데, 안내견이 내 종아리와 구두를 핥았다.
그리고는 내 구두에 턱을 괴고 "편안하게" 눕는거다.
원래 개가 다가오면 경계부터 하는 나에게, 굉장히 편안하게.
마치 어린 아이가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동물에게서 누군가가 나의 옷깃을 잡고 말을 거는 그런 기분은 처음 느꼈다.
나쁘지 않고, 따뜻한 그런 느낌. 편안했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더 가다가
무심결에 내리려고 급하게 걷던 분이 실수로 살짝 안내견의 발가락을 밟았고,
나도 모르게 "저기 조심하세요"하고 안내견을 보호하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여성분은 너무 당황하고, 또 너무 미안해하셨다.
"어머 어머.."하고 말을 잇지 못하시고는,
자꾸 반려견과 그 분을 돌아 보면서 얼굴을 푹 숙이고 내리셨다.
아. 생각보다 어렵구나. 앞이 보이지 않는 분에게 말을 건다는건.
그래서 이런 미안한 상황이든, 배려하는 상황이든 말을 못하시는구나.
당황한 안내견은 그런 상황이 어느정도 익숙한지,
잠시 앉아있다가 다시 자리에 고개를 숙이고 누웠다.
그분도 익숙하게 안내견을 쓰다듬어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내릴 정거장이 되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떼고 문을 향했다.
내가 비우는 그 자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지켜주고 있었다.
사실 옆에 서 있는 내내 안내견의 등에 부착된 안내문의
'사진 촬영, 터치, 음식물'을 금해달라는 로고를 보면서
누군가 다가오면 안내해야겠다는 경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인데
다행히 그 누구도-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전철을 내려서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나는 평소처럼 핸드폰을 만지거나 땅을 바라보지 않았다.
뭐랄까.
그냥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던 것 같다.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면서 길을 걷는게 얼마만인지 모를만큼,
그렇게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나이가 들수록 쉽게 말하는 내 주장들을 주워담고 싶어지는,
출근길의 작은 일이었다. 선한 것이 모든 악을 이긴다는 그런 해묵은 말의 증명.
이런 작은 일들이 하나 하나 모여서,
좀더 풍요로운 마음을 가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뭔가- 겸손한 내 모습을 다시금 꿈꾸게 되는 10월의 어느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