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재수생 시절의 나에게 쓰는 이야기
니가 지금 상상도 못하게 스무살의 나이를 더 먹은 마흔의 너는,
지금 회사에서 한시간 뒤에 진행될 행사를 준비하며
'아무런 표정 없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메일을 쓰고 있다.
오전에는 오후 행사 준비를 하러 창고와 사무실을 오다녔고,
어제는 1주일하고도 3일 간 지방 출장을 다녀온 아내를 위해 고기를 굽고
엄마와 만나 신이난 두 딸을 안아주고 씻기고 재우며 하루를 마감했다.
생각보다 평범한, 대한민국 40대 남성의 삶을 살고 있다.
"출근을 평소보다 한시간 늦게 한다"라는 즐거움 외에,
수능이라는 날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을 발견하지 못하던
마흔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땐 네 인생의 전부였는데 말이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의 신입생 환영회 이야기를 들으며 울적해하고,
어느해보다 더 활짝 핀 벚꽃과 목련을 재수학원 창틀 너머로 보면서
막연하게 오늘의 기쁨을 내년의 대학생이 된 내게 미루는
그런 일년을 보냈던 너의 스무살 인생에선, 정말 수능이 전부였을텐데 말이다.
두번째 수능 시험을 치고 나왔더니
엄마와 누나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고
대학생이 된 친구들도 교문 앞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너무 놀라서 반가워하기보다,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굉장히 재미없는 첫 마디를 꺼낸다.
어, 왜 왔어?
준비한만큼은 시험을 쳤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엄마 누나와 함께 집까지 걸어간다
집에서 엄마가 시켜준 치킨을 먹으며
훗날 변호사가 된 친구가 써준 편지를 읽으며, 수능 해설 영상을 보다가
대학생, 재수생 동네 친구들이 불러 삼호물산 먹자골목으로 달려나간다.
밤하늘에 쏴-하고 쏟아지는 아름다운 은행잎 비를 맞으며
그때 네가 들었던 곡이, 아마 카니발의 '축배'일거다.
자 이제 잔을 높이 들고 그대의 행복을 빌어요
그대 곁엔 내가 있어요 우리 모두 함께 있어요
일년간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년의 나에게 양보하고,
초중고등학교까지 늘 '함께' 하던 친구들과 처음으로 길이 나뉘며
겪어야했던 많은 마음 아픈 일들은 이제 추억이 되어
환한 내 미래에 든든한 연료가 되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겠지.
하지만 너는 지금의 나보다 꼼꼼하지 않아서,
원서를 너무 '이상적으로' 써서 결국 또 실패를 맛보고 만다.
졸업한 고등학교에 수능 성적표를 받으러 갔을 때,
내 성적표를 본 선생님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내 얼굴을 다시 보고는
"L군아. 악수하자. 고생많았다 정말."
라고 축하해줄만큼 두번째 본 수능을 잘 봤던 너는,
내신이든 눈치작전이든 모든 걸 고민하지 않고, "이 아래론 가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처럼 원서를 넣고 귀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다시 시험을 치게 된다.
그렇게 들어간 학교를 잘 적응했지만,
수능 결과에 대한 스스로의 자책을 이겨내기 위해
어머니의 기도와 열정은 여전하셨다.
오히려 자식에 대한 기대와 응원이 부담스러웠던 너다.
어느 겨울, 시험 응시장에 직접 차를 태워주셔서
시험 보고 나왔더니 운동장에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우리 차를 겨우 찾아서 안을 보니
어머니는 기도하다 운전석에서 주무시고 계셨고
그 모습을 본 너는 괜히 혼자 울컥하여 마음을 더 독하게 붙들게 된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는 '성공에 대한 왜곡된 집착'이 이때 생겼다.
현실에 대한 긍정은 곧 '패배'라는 슬픈 인식으로 20대를 보낸다.
그렇게 준비했던 편입 시험, 대학 4군데 정도를 불합격하고
3학년 1학기부터 동아리 생활, 대외활동 등 대학 생활에 집중하여
오히려 뒤늦은 대학 생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마침내, 수능으로부터 발목을 잡아온
족쇄를 한번에 털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너는 대학 입학을 할 때도 고개를 숙였고, 편입까지 실패하면서
'축하받는 법'에 익숙치 않은 그런 사람이 서서히 되어갔지만
이때부터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당당한 삶을 택하게 된다.
제대로 축하받고, 존중받고, 인생을 즐기는 법을 깨닫게 된다.
그룹 연수에서도 누구보다 주목받는 사람, 원하는 부서에 제대로 배치받고
여지껏 경험한 적 없는 '승승장구하는 직장인'의 삶을 시작하며
이렇게 영원히 수직 상승할 일만 남았다고 기대하지만-
'내 최고의 자랑인 회사'를, 몸과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만둔다.
그 후 그토록 가고싶던 유럽 여행을 떠나 혼자 외로운 겨울밤을 보내며,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본인과의 지독한 대화를 이어가며
진정한 자유를 넘어'가치있는 속박'에 대한 인생 3막의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1년을 쉬고,
20세 이후로 이어진 '인생의 굴곡' 덕에 단단해진 멘탈로 무장하여
1년 뒤 서른네살에 결혼하고,
그리고 1년 뒤 서른다섯살에 서울에 집도 사고,
TV에 나오는 슈퍼스타를 꿈꾼적도 있었을 것이고
당시 공부 잘하는 선배들이 꿈꾸는 변호사의 길도 막연히 꿈꿔봤을 것이다.
누군가처럼 대기업 임원이 되는 꿈도 꿔봤을 것이고,
대학에서 만난 친구처럼 멋진 옷과 차를 타는 삶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마흔이 되는 지금까지도 내게 수능이라는 거대한 삶의 이정표는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님이 '살기로 결정한'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온 뒤,
그때부터 모든 것을 내 선택에 내가 책임지는 성인의 삶이 결정이 된다.
아직 불안한, 그러나 꿈이 많은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의 20년 뒤의 삶은 네 생각보다 평범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 때의 네가 바라던 어른의 모습에
생각보다 많은 그림을 네가 스스로 그려냈다는 것과,
막연히 그리지 못하던 밑그림을 너무나 훌륭하게 완성했다는 것을
꼭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결과가 어떻게되든 너무 걱정하지 마라.
마흔의 너는 네 생각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지금의 네가 바라는 좋은 어른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
그저 너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현재에 집중하는'
스무살의 모습을 간직하기를 바란다.
마흔의 빛나는 내가 있기까지, 스무살의 소중한 네가 있었다,
고맙다. 나의 스무살.
수능을 치룬 이 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잠에 들길 바란다.
- 2023년 11월 수능날, 마흔살이 된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