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전통의 남부 잉글랜드로 떠나는 가족여행 #1
언뜻 보기에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건물이나 물건도 툭하면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소중히 여기는가 하면 구설수도 많고 통치자로서의 권위는 없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내가 살았던 영국의 집도 빅토리안 하우스(Victorian House)라고 해서 200여 년 전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지었던 집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 집을 따라서 죽 이어져 있는 동네 블럭 전체가 동일한 시대에 지어진 연립 주택들이라 어느 한 집만 부수고 다시 지을 수도 없었나 보다.
영국 사람들은 집을 리모델링할 때도 외형은 완전히 그대로 둔 채 내부만 수리한다. 어릴 때 강가에서 모래로 두꺼비집을 지으며 속만 파내며 놀았는데 딱 그런 느낌이다.
여기는 지붕수리 전문업자, 정원사 등 집 관리를 위한 직업들도 매우 세분화되어 있다. 심지어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수백 년 된 벽돌도 버리지 않고 다시 쓴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 눈에는 세상 느리고 비효율적이지만, 그들은 이런 전통을 유지하는걸 아주 중시 여기는 것 같다.
런던에 살며 본 인상 깊었던 영화 중 하나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화를 다룬 '이미테이션 게임'(데이비드 컴버배치 주연)이었는데, 영화 자체로도 재미있었지만 주인공이 비밀 미션을 수행하느라 머물렀던 시골의 집이나 영화에 배경으로 나오는 영국의 모습이 현대 영국과 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변화를 싫어하는지(아니면 두려워하는지)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가을이 깊어가고 아이들의 중간 학기 방학이 돌아온 어느 날, 나는 오랫동안 별렀던 남부 잉글랜드를 3일가량 돌아보기로 했다. 런던처럼 왕실의 중심이거나 화려한 볼거리를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는 데다 유럽에서 시골이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잉글랜드 지방 여행을 그동안 바빠서 미뤘던 이유도 있었다.
고심해서 잡은 일정은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가 보관되어 있는 솔즈베리 대성당을 거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스톤 헨지(Stonehenge), 고대 로마의 휴양지였던 바스(Bath)를 지나 아름답게 보존된 시골 마을들로 유명한 코츠월즈(Cotsworlds), 세계 최고의 대학도시 중 하나인 옥스퍼드(Oxford)까지 돌아보는 것이었다.
척박하고 날씨도 안 좋은 늪지대, 중세 이전만 해도 유럽의 작은 섬나라이자 이류 국가로 인식되었던 영국은 어떻게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고, 산업혁명을 통해 20세기 강대국으로 세계 경제를 이끌었으며 문화와 역사, 전통의 선진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영국에 살다 보면 일반 사람들의 인권과 노동법, 복지, 자유에 대한 의식 수준에 놀랄 때가 많다. 우리나라는 대다수의 편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 있지만, 영국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단적인 예로, 크리스마스가 되면 기차도 지하철도 가게들도 모두 쉰다.
설날이 되면 시민 편의를 위해 지하철을 새벽 2시까지 연장 운행하는 우리나라와 정 반대인 셈.
여기서는 지하철 기관사도 승객과 똑같이 크리스마스를 즐길 권리가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축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준 나라.
학자들은 그 출발을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로 본다.
1066년 노르망디 대공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정벌하여 노르만 왕조를 연 이래, 헨리 2세의 아들 존은 형 '사자심왕' 리처드에 이어 1199년에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존 왕은 형과 같은 용기와 모험심이 없었고, 아버지 헨리 2세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지역의 땅을 쓸데없는 전쟁으로 모두 잃었을 뿐 아니라 잔인하고 비겁해서 귀족들과 국민들이 따르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지고 백성들의 신망을 잃어 힘이 약해진 존 왕의 실정을 참지 못한 귀족들이 들고일어났다. 1215년,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존 왕을 압박하여 '대표가 없는 곳에 세금은 없다(세금을 받으려면 자유민 대표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와 '자유민의 체포와 처벌은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의 2가지 조항으로 유명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에 서명하도록 했던 것.
왕의 절대 권력은 돈과 물리적 구속력에서 나오는 법인데, 마그나 카르타는 그 2가지를 왕에게서 빼앗음으로써 왕권을 크게 약화시켰고, 나중에 잉글랜드 왕의 권한은 '군림은 하되 통치하지는 않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처럼 절대적 권력으로 다스렸던 왕도 있었지만, 영국은 존 왕 이후 800여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귀족과 평민들이 왕권과 대립하고 타협하며 차근차근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인권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마그나 카르타는 언제나 그 주춧돌로서 역할을 해 왔다.
고등학교 역사 수업이 아니면 들어보기 어려웠던 민주주의의 초석, 마그나 카르타의 원본은 4부가 보존되어 전해 내려오며, 그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1부가 바로 솔즈베리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솔즈베리 대성당은 영국식 초기 고딕 양식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이유만으로도 방문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마그나 카르타는 2009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마그나카르타’의 중요성은 과세, 봉건적 권리와 사법 분야에서의 왕의 권위에 대해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제한을 가했다는 점과, 왕의 부당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관례의 힘을 재천명하였다는 점에 있다. 본질적으로 왕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법 안에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수립한 것이 대헌장이었다.
‘마그나카르타’는 1215년에 러니미드(Runnymede)에서 존 왕이 남작들을 만났을 때 인장을 찍은 단 하나의 원본 문서는 아니었다. 그 합의는 구두로 이루어졌고, 후에 왕의 필경사에 의해 왕의 칙허장으로서 문서로 선서를 하고 확인되었다. 1215년 6월, 전국에 ‘마그나카르타’의 사본을 많이 보냈지만 현재 이들 가운데 4부―영국 도서관에 2부, 링컨(Lincoln) 대성당과 솔즈베리(Salisbury) 대성당 문서보관소에 각각 1부씩 남아 있다.
‘마그나카르타’의 선포는 영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현재 남아 있는 4부는 영국 생활방식의 상징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물로서 지속적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출처 :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솔즈베리 대성당은 서기 1220년 ~ 1258년에 걸쳐 건축된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솔즈베리 주교좌 성당으로 런던에서 남서쪽 방향을 따라 약 2시간가량 운전하면 닿을 수 있다.
일교차가 적고, 춥고 습한 날씨 덕에 단풍은 언감생심 볼 수 없는 나라이지만 늦가을 아침에 상쾌한 마음으로 솔즈베리를 향해 차를 몰았다.
마침 솔즈베리 근처에는 스톤헨지가 있었기 때문에, 대성당을 방문한 후 스톤헨지를 들렀다가 바스(Bath)의 숙소에 들어가기로 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사전에 꼼꼼하게 알아보지 않았던 안일함 때문에 크게 후회를 하게 된다.
가을이 물드는 영국의 아름다운 지방도를 달려 솔즈베리에 도착한 시간은 화창하게 햇빛이 내리쬐는 점심 무렵이었다. 대성당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고개를 들어보니, 높다란 첨탑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123미터의 첨탑을 자랑하는 솔즈베리 대성당은 잉글랜드 초기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성당이다.
대성당은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앞 뜰에는 커다란 나무가 낙엽을 떨구고 있었는데 누런 낙엽이 새하얀 석탑을 배경으로 초록 잔디밭과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노르만 왕조 시절, 프랑스인들이 왕실과 상류층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영국은 프랑스에서 발달한 고딕 양식을 일찌감치 받아 들었다. 그러나 과학적 이해도가 낮아 수직으로 높게 솟아 상승감이 극대화된 프랑스의 고딕 양식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수평적이며 장식적 요소가 강조된 독창적 방식으로 발달했다.
고딕 양식의 도입 초기에 비교적 단기간 동안 지어진 솔즈베리 대성당은 장식이 강조된 후기의 영국 성당들보다는 프랑스식 간결한 구조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당의 디자인은 프랑스 전성기 고딕 양식에 비해 평면은 단조로우며 건물의 동쪽 끝부분도 반원형이 아니라 네모난 형태로 마무리되어 있다. 그러나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tress)와 높이 솟은 첨탑들, 빛을 많이 받기 위해 네이브 월(Nave Wall)에 촘촘히 나 있는 뾰족한 아치 모양의 창들이 고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육중해 보이는 거대한 문을 지나 성당의 내부로 들어갔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은 다발 기둥들이 정교하고 화려한 뾰족아치(첨두아치)를 그리며 수랑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반면, 리브-볼트(Rib-Vault; 천장을 받치는 골격)는 생각보다 간결한 모습이었다.
고딕 양식에서 천장(볼트)의 하중을 분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리브가 영국 교회들에서는 장식적 요소로 크게 변화하게 된다. 성당이 수직보다 수평적으로 넓어지며 리브의 기능적 측면이 줄어들었기 때문.
미사를 위한 신도석으로 일반 강당 의자들을 줄지어 세워 놓아 웅장한 기둥들 사이에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성당 내부는 높고 웅장하며 강인한 고딕의 장식들이 통일감 있게 구성되어 있다. 좁고 긴 아치형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3단으로 구성된 네이브 월(Nave Wall), 화려하게 장식된 예배당들과 성가대석, 파이프 오르간 등이 눈길을 끈다.
회랑 한가운데는 언뜻 거대한 거울이 눕혀져 놓여 있는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거울이 아니라 네 방향으로 물이 떨어지는 분수였다. 한치의 물결도, 티끌도 없는 물의 거울은 웅장한 성당 내부와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를 그대로 비춰주고 있었다. 마치 ‘부끄러움이 없다면 이 곳에 네 얼굴을 비춰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솔즈베리 대성당은 공식적으로 입장료가 아닌 도네이션을 받는다. 가이드를 동반해서 종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이들이 당연히 반대하여 시도를 해보지 못했다. 다른 높은 건물이 없는 잉글랜드의 시골 마을을 높은 첨탑에서 내려다보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높은 독일 쾰른 대성당의 종탑에서 내려다본 광경만큼 아름다울지.
한편, 마그나 카르타는 성당 안쪽의 뜰을 따라 나 있는 중정을 통해 갈 수 있는 별도의 장소, The Great Chapter House에 보관되어 있다.
원본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열람만 가능하다. 2018년 10월, 40대 중반의 남성이 마그나 카르타가 보관된 유리 박스를 해머로 내리쳐 탈취하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원본에 손상이 발생하지는 않아서 2019년 초부터 다시 전시가 시작되었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보물이 훼손될 뻔했다.
솔즈베리 대성당 내부에는 마그나 카르타 외에도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기계식 시계가 있다. 중세 시대에 설치되기 시작한 기계식 시계들은 크고 비싸고 무거워 도시의 공공장소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1386년에 설치된 이 시계는 원래는 대성당 내부가 아닌 별도의 종탑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1700년대에 종탑이 무너졌고 1956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시계는 오늘날처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매시간마다 종을 쳐서 알려주는 방식이다. 이걸 복원해서 지금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정원으로 나와 높이 솟은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교회 탑이라고 하지만 프랑스의 고딕 성당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수직감이 강하지는 않다. 아마 성당의 한가운데 트랜셉트(Trancept) 교차 부분에서 쌓아 올린 바람에 바로 옆에서 올려다보지 못해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지나치게 웅장한 프랑스의 대성당들 대비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돋보였다.
웅장한 솔즈베리 대성당은 가까이에서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침 성당 주위는 넓은 잔디밭으로 틔여 있고 곳곳에 소풍삼아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도 넓은 잔디밭을 한 바퀴 돌며 아름다운 대성당을 감상해 보았다.
영국의 가을 해는 매우 짧다. 오후 3시가 가까워 오니 벌써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저녁 시간까지 바스(Bath)로 가기 위해 얼른 스톤헨지로 차를 몰았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2800년 경에 만들어진 원형의 돌기둥 무리로 아직도 그 정확한 용도가 알려지지 않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리고 있다.
솔즈베리에서 얼마나 머무를지 계획했던 바가 아녀서 스톤헨지는 사전에 예약해 두지 않았었다. 일단 무작정 입구로 들어섰는데 안내원이 차 앞으로 다가온다.
'스톤헨지 오셨나요?'
'네, 지금 들어갈 수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3시 반에 마감되어 더 이상 입장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비수기이고 가을이라 5시까지 관람이 가능한 줄 알았는데 오늘 입장은 3시 반까지였단다. 진입로의 구조상 스톤헨지는 이 입구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볼 수 없다. 넓은 들판에 있는 돌기둥들이야 쉽게 가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스톤헨지를 실제로 보러 간다고 들떴던 아이들이 크게 실망을 했고, 나는 철저히 알아보지 않은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는 깨끗하게 포기하는 것이 영국에서 사는 지혜, 다음을 기약하며 빠르게 차를 돌렸다. 런던에서 2시간도 안 걸리는 곳인데, 언제고 또 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스톤헨지에서 아쉽게 발길을 돌려 첫날 숙소인 바스의 에어 비앤비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