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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Dec 24. 2019

영국 속 고대 로마의 발자취, 바스(Bath)

역사와 전통의 남부 잉글랜드로 떠나는 가족여행 #2

'목욕하다'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영국 잉글랜드 남쪽에 있는 인구 10만 명의 작은 도시 바스(Bath; 영국식 발음으로 베스가 아닌 '바스'라고 해야 한다.)는 도시명이 영어 그대로 '목욕하다'라는 뜻이다.

영국 영어에는 미국식 영어로 이해하기 어려운 발음도 많고, 알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전통적인 단어도 많은데 이 도시 이름을 듣고 재미있다고 웃으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목욕하다'라는 영어 단어의 유래가 바로 이 도시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영국의 잉글랜드는 영어의 원산지이고, 특히 옥스퍼드(Oxford) 지역에서 쓰이는 영어는 'Queen's English'라고 하여 영어 중의 영어로 인식된다.(영어의 표준어이다.) 영국인들은 미국인이 쓰는 영어를 'American'이라고 농담 삼아 웃을 때도 있고, 미국인들은 잉글랜드 사람들이 쓰는 영어를 '귀족 영어'라고 내심 부러워하기도 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티를 잘 내지 않는다.

런던의 우리 사무실에서도 영국인과 미국인이 섞여 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그런 밀고 당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스는 잉글랜드에서 유일하게 천연 온천수가 솟아난 지역이다.

바스와 브리스톨(Bristol) 지역을 아우르는 남쪽 잉글랜드에 있는 멘디프 힐스(Mendip Hills)는 대규모 석회암 지대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곳에 내린 비가 땅 속 석회암 지대를 통과하여 깊이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수층을 이루었고, 이 지하수는 지각의 압력에 의해 섭씨 70 - 90도로 달궈졌다.

이 뜨거운 지하수가 지표로 솟아오르는 곳이 오늘날의 바스이며, 지금도 온천수가 솟아오르고 있다. 멘디프 힐스는 석회암 동굴로도 유명하다.

멘디프 힐스 전경(사진 출처 구글 맵, by Guy Dennison)


로마와 브리튼 섬(영국)

섬나라 영국은 수백 년 간 로마의 속주 브리타니아(Britania)였다. 영국을 의미하는 GB(Great Britain)의 브리튼은 브리타니아에서 유래했으며, 런던(London)은 로마가 세운 도시 론디니움(Londinium)에서 유래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잉글랜드의 뿌리는 로마인 셈.

 

지중해 연안을 비롯해 지금의 프랑스 갈리아 지방과 독일 게르만 지역까지 정복했던 로마가 잉글랜드 정벌에 나선 것은 기원전 55년 경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였다. 이후 4세기경 게르만의 대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며 본토 방어를 위해 영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로마인은 400여 년 간 섬을 지배했는데, 그 영토는 오늘날의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아우른다.


이민족이 지배했다면 그 역사를 일종의 '굴욕'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감성일 텐데 유럽인들은 그렇지 않다. 로마는 눈부시게 앞선 문명을 가져와 '미개'했던 섬나라에 심었고 당시 영국의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은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동화되었다. 대부분의 서유럽인 들은 로마 문화를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단일 민족'을 강조해 온 우리와는 인식 자체가 다르다.


다만, 그때도 차갑고 척박한 북쪽의 스코틀랜드 지역은 로마인의 눈에 야만인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로마의 14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에 제국 최북단의 방어벽을 세워 야만 국가의 침략에 대비했는데, 높이 6m에 길이가 120km에 달해 유럽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이 방어벽을 하드리아누스 장벽(Hadrian Wall)이라 부른다.

HBO의 판타지 시리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에 나오는 거대한 장벽(The Wall)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유명하다. 장벽은 1987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잉글랜드 북쪽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좌, 사진출처 위키피디아)과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첫 장면에 나오는 장벽(우, 캡쳐)


온천과 목욕을 좋아하던 로마인들은 서기 60 - 70년 경에 천연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바스에 아쿠아에 술리스(Aquae Sulis)라고 불리는 로마식 온천탕과 사원을 세웠다. 로마인들은 주요 대도시마다 공공 목욕시설을 세우고 운영했는데, 이를 로만 바스(Roman Baths) 또는 테르메(Thermae)라고도 부른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비슷한 이름의 온천 워터파크도 이 이름을 땄을 것이다.


아쿠아에 술리스를 오늘날 로만 바스라고 부르며, 이 곳은 유럽 내에서도 가장 온전하게 보전된 고대 로마의 온천 휴양시설이다. 이탈리아를 다녀봐도 로마의 목욕탕들이 흔적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데, 휴양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북쪽 섬나라에 이렇게 훌륭하게 보존된 시설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바스는 도시 전체가 1987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로마인이 서기 43년에 브리튼 섬을 정복한 후, 유럽에 건설한 많은 온천 도시들은 주요 역사 도시가 되었다. 서기 60~70년에 건설된 아쿠아에 술리스는 배스라고 불리며 오랫동안 온천 도시로 유명했다. 배스는 18세기에 최고 전성기였다. 로마인들은 온천과 2개의 풀이 있는 5곳의 목욕탕(네 군데는 로마시대, 한 군데는 중세시대의 것), 그리고 테피다리움(미온탕, Tepidarium)·프리지다리움(냉탕, Frigidarium)·하이퍼코스트(난방실, Hypocaust)의 모든 표준적 시설들뿐만 아니라, 미네르바와 연관된 현지 여신인 술리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온도 46℃ 이상의 물이 하루에 1,200,000ℓ나 나오는 이 온천은 1세기~4세기 사이에 건설되었고, 1755년 점차적으로 재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출처: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로만 바스(Roman Baths) 가다

고심해서 고른 바스의 Bed & Breakfast는 아담했지만 깔끔했고 주인장이 너무 친절했다.

전날 솔즈베리 대성당을 들러 저녁식사를 하고 늦게 도착했는데, 기다렸다가 반갑게 맞아주며 건물 뒤의 주차장을 알려주고, 열쇠를 건네주며 방을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싱글 침대 2개와 더블 침대 1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침실은 작았지만 아늑했다.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면 한 방에서 옹기종기 밤을 보낼 수 있어 좋다.


바스는 도시 전체가 중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로마가 철수한 후 온천 휴양시설이 거의 폐허가 되고, 양모 산업 위주로 발달했던 도시는 중세 이후에 여러 번에 걸쳐 재개발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도시 모습은 16세기 이후에 수백 년에 걸쳐 온천이 재개발되면서 자리 잡은 모습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B&B도 밖에서 보니 오랜 세월의 흔적이 녹아있는 연립주택 중 하나였는데, 길을 따라 가꾸어 둔 집 앞 정원이 전형적인 영국의 주택가였다.

바스는 길거리를 조금 걸어도 중세로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도시이다.

숙소 정면의 모습. 아담하지만 깔끔했던 집


숙소에서는 아침식사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English Breakfast)를 제공했다. 영국에 살아도 일상생활에서는 웬만해서는 잘 먹지 않는 음식 구성이지만 국내 여행을 다니면 종종 먹는다. 햄, 소시지와 베이컨, 토마토, 계란 프라이와 레드 빈을 빵과 커피를 곁들인 아침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네댓 개의 테이블이 옹기종기 들어찬 작은 조식 레스토랑은 서빙을 하는 두 명의 직원으로 차분한 듯 분주했는데 서비스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정갈하게 깔린 식탁보와 수수하지만 하얀 접시에 담긴 음식은 잉글랜드 전통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저렴한 B&B라서 유럽의 여느 2-3성 호텔과 비슷한 다소 성의 없는 조식 정도만 생각했던 나로서는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커피도 석 잔이나 마시며 가족들과 한참 동안 즐거운 아침식사를 즐겼다.

B&B에서 제공한 잉글리스 브랙퍼스트.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아침을 마치고 바스 중심가 인근에 차를 댄 후 로만 바스를 향해 걸었다. 휴일 아침이라 도시는 조용했고 골목길의 바람은 상쾌했다. 바스의 중심가는 생각보다 작아서 천천히 둘러보며 10분가량 걸으니 금방 로만 바스의 입구에 도착했다. 골목길을 벗어나자마자 펼쳐진 작은 광장 뒤로는 로만 바스보다 먼저 웅장한 교회가 눈길을 끌었다.


바스 수도원(Bath Abby)이다.

이 수도원은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성당으로 영국식 고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마그나 카르타가 있는 , 솔즈베리 대성당)

프랑스에서 고딕 양식을 일찌감치 받아들였던 영국은 양식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는데, 그중 하나가 천장의 리브 볼트(Rib Vault)를 장식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영국에서는 건물을 수직적으로 올리기보다 수평적으로 지으며 하중을 분산시키는 리브 볼트의 기술적 효용이 떨어져 장식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바스 수도원 역시 천장의 팬 볼트(Fan Vault) 장식이 유명하며, 이런 이유로 영국의 1급 국보급 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정상 바스 수도원은 들어가 보지 못했다.



영국식 고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바스 수도원. 아쉽게 이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영국 고딕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바스 수도원의 천장 구조(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이번 바스 여행의 목적은 로만 바스였고, 그 입구가 바스 수도원의 바로 옆에 있다. 나는 과감하게 수도원을 스킵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로만 바스로 입장했다.

로만 바스는 지상층과 지하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입장하면 일단 지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대 로마의 온천탕을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로만 바스에서 로마 시대에 건설된 시설들은 모두 지하층에 있고 현재 지상의 모든 건축물은 중세 이후에 건설된 것이다.

바스 수도원의 전면부와 광장 오른쪽의 로만 바스 입구


이 곳은 초록빛 온천수가 매우 인상적인데, 물에는 소듐, 칼슘, 황산염, 철분 및 각종 염화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로만 바스는 온천욕이 금지되어 있다. 1978년에 온천탕에서 수영을 하던 한 소녀가 수막염에 걸려 사망했는데, 테스트 결과 물에서 뇌를 좀먹는 아메바가 검출되어 그 후로 폐쇄되었다.

하긴, 바스 시내에는 현대적인 스파 시설이 따로 있어 충분히 온천을 즐길 수 있으니 이 고대의 아름다운 유적지는 후손을 위해 보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초록 온천탕을 보고 있자니 손이라도 담그고 싶어 아쉬운 맘이 든다.

지상층에서 내려다 본 로만 바스의 온천탕. 실내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지상층에서 내려다 본 로만 바스의 온천탕


온천탕 주위에는 로마 장군의 복장을 한 동상들이 도열해 있다. 동상들은 로마 시대에 브리타니아를 통치했던 총독들과 황제들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드리아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황제 등이 있다. 온천탕을 야외에서 관람하는 구조라서 입구를 등지고 왼쪽 옆으로는 바스 수도원이 바로 보이는데, 로마인의 동상 뒤로 보이는 고딕의 건축물이 매우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로만 바스에서 바라본 바스 수도원


지상층을 둘러보고 나서 바로 박물관으로 들어가 보았다.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로마의 유물들을 둘러보고 있으면 이 곳이 온천이자 사원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중 인상적인 것은 당시 사원의 삼각 지붕 부분이었다. 그리스-로마식 건축 특유의 코린트 기둥이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지붕의 구조물은 석재 장식의 일부가 남아 그 크기와 구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건물은 폭이 약 8미터에 이르고, 높이는 2.4미터가량이었다고 한다.


가운데 있는 머리 장식은 고르곤(Gorgon)의 머리로 알려져 있다. 얼굴을 쳐다만 봐도 돌로 변한다는 메두사가 바로 세 명의 고르곤 자매 중 하나.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고르곤의 머리는 건물의 수호 의미로 장식되었다.

조각의 얼굴이 남자로 보여 바다의 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삼각 지붕 유적. 온천 고대 유적의 일부이다.


박물관 한가운데는 청동으로 도금된 머리 동상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1700년대에 발굴된 이 두상은 당시 이 지역에서 숭배했던 미네르바 여신(Sulis Minerva)으로 유적에는 미네르바에 대한 봉헌물을 많이 볼 수 있다.

지혜의 여신으로도 알려져 있는 미네르바는 이 지역에서 풍요를 상징했다고. 이 온천에서 고대 로마의 동전이 12,000개 이상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신에 대한 봉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Sulis Minerva의 두상과 출토된 고대 로마의 동전들


박물관에는 고대 온천의 모습이 모형으로 복원되어 있어 그 구조를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모형은 4세기경에 온천이 확장되고 난 이후의 모습이다.

고대 로마 온천의 모형(파란색 부분이 물이 흐르는 부분)


박물관 안을 걷다 보면 발아래로 여전히 온천수가 배수로를 통해 흘러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상에서 본 초록 온천탕의 물이 로마 시대에 지어진 배수로를 통해 지금도 흐르고 있는 것. 물의 철분 성분으로 배수로 바닥이 짙은 주황색으로 변한 가운데 2천 년 가까이 물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온천수가 흘러 나가는 배수로


고대 로만 바스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어느새 아래층의 대온천탕(Great Bath)으로 나오게 된다.

가까이에서 본 온천수 위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다 차가운 바람에 밀려가는데, 그 모습이 물안개처럼 보인다. 아들이 물의 유혹에 못 이겨 손을 담그려고 했는데 아내가 '안돼!'라고 주의를 주었다.

옆에는 온천에 손을 넣지 말라는 안내문도 있었다. 손 한번 담근다고 오염이 될 것도 아니긴 하지만, 유적을 보호해야 하기도 하고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이런 경우에는 아내가 아이들에게 과하게 주의를 준다.

아래로 내려와 본 온천탕은 위에서 볼 때와 다른 조경미를 뽐내고 있었다.

로만 바스의 대온천탕


로만 바스가 가장 잘 보존된 로마의 온천탕인 이유는 여러 가지 용도의 시설이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 방을 하나하나 돌아보면 그 규모와 쓰임새에 감탄하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찜질방보다 더 좋다고 느껴질 정도.

예를 들어, 급탕 사우나 시설이었던 칼다리움(Caldarium)은 마룻바닥 부분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아래 뜨거운 공기를 순환시켜 덥혔던 구조가 매우 인상적이다. 급탕 안에는 스팀 사우나와 건식 사우나 시설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급탕 시설을 거쳐 온탕 시설이나 프리지다리움(Fridgedarium)이라는 냉탕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었다. 2천 년 전에 습식, 건식 사우나와 급탕부터 냉온탕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온천 시설을 운영했던 것인데, 그 과학적 수준에 놀랄 수밖에 없다.

칼다리움(좌, 급탕 시설)과 프리지다리움(우, 냉탕)


웅장한 유럽의 고딕 성당에 들어가면 5분 만에 나가자고 졸라대던 아들도 로만 바스는 아주 인상이 깊었나 보다. 박물관의 유적들도 유심히 살펴보고 온천도 관심 있게 돌아다녀 본다. '아들은 역시 물이 있어야 역사 공부의 동기부여도 되나 보다'라며 웃었다.

나중에 평가를 들어보니 온천 유적 덕에 바스 여행이 참 좋았다고 했다.


펄트니 다리(Pulteney Bridge)

로만 바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알차고 볼 것이 많아 시간을 상당히 지체했다.

이번 여행은 3일간 계획한 일정이라 당일로 코츠월즈를 거쳐 옥스퍼드까지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약간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하더라도 걷기 쉬운 바스에서 놓치지 말고 가봐야 할 곳을 한 군데 더 꼽으라면 단연 펄트니 다리일 것이다.


1774년에 바스의 에이번 강(River Avon)을 가로지르며 완공된 이 다리는 다리 위 양쪽 면에 걸쳐 처음부터 끝까지 상점이 늘어서 있는 세계에서 4개밖에 없는 다리 중 하나이다. 모양으로만 보면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나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와 매우 흡사한데, 역시나 건축할 때 두 다리들을 본땄다고 한다.

에이번 강가의 펄트니 다리까지는 로만 바스에서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두 블록만 가보면 멋진 다리를 볼 수 있다며 앞장섰다.

에이번 강가에서 본 펄트니 다리


그러나, 정작 이 다리가 유명한 이유는 다리 아래 강에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에서 배경으로 나오는 펄트니 보(Pulteney Weir)가 있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을 2012년에 영화화한 이 작품은 휴 잭맨과 러셀 크로우, 앤 해서웨이와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주목을 받았다. 원래 나는 뮤지컬 스타일의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레 미제라블은 원작의 감동적인 이야기와 배우들의 탄탄하고 섬세한 연기,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 덕에 정말 인상 깊게 감상한 영화이다.


작품에서 장발장과 대립하는 법과 원칙의 경찰관 자베르(Javert, 러셀 크로우 분)는 선과 악, 위법과 정의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밤에 센 강에 투신한다. 영화의 배경은 파리의 센 강지만, 실제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은 바스 에이번 강의 펄트니 보(Pulteney Weir)이다.

레 미제라블의 포스터와 자베르 경감이 투신하는 장면(영화 캡쳐)


바스 시내의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펄트니 보는 중세 후기에 건설되었으며, 1603년부터 문헌에 등장한다. 현재의 V자 형태 보는 1970년대에 완성되었는데 레 미제라블을 통해 매우 유명해졌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펄트니 보. 오른쪽에 펄트니 다리가 보인다. (사진 출처 : www.atlasobscura.com)


에이번 강가에서 펄트니 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영화에서 자베르 경감이 비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며 다리의 난간을 걷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만큼 펄트니 V자 보는 인상적이다.

강 건너 노랗게 물든 가을 나무와 짙은 청색의 강물을 배경으로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에이번 강가에서 바라본 펄트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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