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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Dec 09. 2019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서다

대항해시대의 중심, 리스본으로 떠나는 가족여행 #4

어느 날 문득 특별한 곳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로마나 파리처럼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 아니라 숨겨진, 하지만 색다른 의미가 있는 곳 말이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본초 자오선 위나 에콰도르의 적도 선 위라면 그런 의미가 있을까?

포르투갈 리스본 근교에는 지리적으로 특별한 곳이 있는데, 바로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호카곶(Cabo da Roca)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대륙 전체의 땅끝 마을이라니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 아닐 수 없다.

항해왕 엔히크 왕자 이전에 유럽 사람들은 북대서양 섬들 너머로 펄펄 끓는 암흑의 바다 즉, 지옥이 있다고 믿었던 만큼 호카곶이야 말로 세상의 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리스본 여행자들은 호카곶을 중심으로 왕실의 휴양지였던 카스카이스와 신트라에 있는 동화 속에서 봄직한 페나 성(城)까지 하루에 돌아보는 여행을 하는데, 우리는 차도 없이 기차와 버스로 느릿느릿 다니는 데다 물놀이에 빠지면 하루도 부족한 아이들 덕분에 카스카이스를 들러 호카곶까지만 다녀오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카스카이스와 호카곳의 지리적 위치


카스카이스(Cascais)

리스본에서 전철로 40분이면 도착하는 카스카이스는 1870년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루이스 1세(Luís I)가 왕실의 여름 별장을 지으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왕이 있는 곳에 귀족들이 모였듯 그 후로 포르투갈 상류층이 자주 다녔던 휴양지라고 한다. 도시는 작지만 19세기 스타일의 엔틱 한 건물들이 많다.


전날처럼 동네 카페에서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마친 우리는 마르팀 모니즈(Martim Moniz)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발해 카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é)역에서 전철로 갈아탔다. 테주 강을 따라 1시간가량을 시원하게 달리다 보니, 강이 바다로 이어지는 대서양 입구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 카스카이스에 도착했다.

열차는 30분 간격으로 있으니 출도착 시간을 따질 필요가 없고, 도시는 역을 중심으로 작게 발달되어 있어 도보로 다니기 편리하다.

카스카이스행 전철로 갈아탔다.


바닷가로 가는 길은 남유럽이나 지중해 특유의 물결무늬 타일이 깔려 있어 인상적이었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답게 길거리는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시원하게 깔린 타일 길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원색의 파스텔톤으로 정취를 더하고 있었고 곳곳에 재미있는 벽화들이 눈에 띄었다.

한 바퀴 도는데 30분이면 족할 작은 마을이지만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질 만큼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 곳이다.

 

도착한 시간이 오전 시간이어서 그런지 많은 상점들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더운 남쪽 나라 포르투갈 사람들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식사나 음주를 즐기는 대신 하루의 시작이 늦다.

아이들의 머릿속이 온통 ‘바닷가’로 꽉 차 있었기에 다른 곳에는 눈길을 줄 틈도 없이 해변으로 직행했다. 남쪽나라라 해도 아직은 쌀쌀한 봄날이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스카이스 역에서 바닷가로 가는 길
물결무늬 타일과 원색의 파스텔 톤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는 카스카이스 골목길


하늘은 흐렸지만 에메랄드 빛이 살짝 도는 바다는 무척 맑았고, 암석 절벽 위에는 포르투갈 특유의 주황색 지붕을 얹은 흰 저택들이 파란 바다와 잘 어우러져 있었다.

호주 시드니 근교 바닷가 절벽의 마을이나 샌프란시스코 위쪽 소살리토 언덕이 생각나는 멋진 마을이다.

카스카이스의 해변 한쪽


웃통을 벗어부치고 해변에서 노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조급해진 아들이 얼른 옷을 갈아입고 파도로 뛰어갔다. 날씨가 생각보다 추워서 발목만 담가도 '앗- 차가워' 소리가 절로 나올 법도 하건만 아이들은 이내 파도와 모래를 장난감 삼아 놀이에 빠져들었다.

동생이 노는 걸 시크하게 바라만 보던 첫째도 이번에는 같이 발을 물에 담갔다. 그렇게 아이들은 점심때가 가도록 한참을 놀았다.

앗 차가워!
파도를 배경 삼아 모래사장 위에서.


호카곶(Cabo da Roca)

바닷가에서 두어 시간을 보낸 후,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마음이 약간 급해졌다. 차를 렌트했었다면 목적지인 호카곶까지야 휙- 하고 쉽게 다녀왔겠지만 우리는 시외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출도착 시간을 잘 맞춰야 했고, 해가 지기 전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기 때문이다.

호카곶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사실 신트라와 카스카이스를 왕복하면서 중간에 호카곶을 들르는 루트로 다닌다. 따라서, 호카곶에서 돌아올 때는 신트라가 아닌 카스카이스행 버스인지 잘 확인하고 타야 한다.


우리네 읍내 정류장 같은 카스카이스 터미널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랐다.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에 앉아 창 밖을 보고 있자니, 어릴 적 강원도 산골에 살 때 엄마와 '군내버스'를 타고 화천 읍내 시장에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엄마를 따라가 얻어먹었던 짜장면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한 번은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혼자 길거리 벤치에 앉아서 엉엉 울었던 적도 있었다.


사람의 기억력은 신기하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떻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지금 무심하게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도 언젠가 아빠와 다녔던 이 순간을 새삼스런 추억으로 떠올릴까? 호카곶을 가는 중간의 작은 마을에서 타고 내리는 현지 사람들을 보면서, 옛날 엄마의 모습이 비쳤다.

이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딸은 버스 창 밖이 예쁘다며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신트라 - 호카곶 - 카스카이스를 왕복하는 시외버스


널찍한 지방도를 달리던 버스가 구불구불한 좁은 길로 들어선 지 30여 분 흘렀을까, 다 온 듯 아닌 듯 자꾸만 바뀌는 창밖의 풍경에 조급함과 설레는 마음이 교차할 때쯤 버스는 호카곶에 도착했다.

호카곶은 지리적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궂은 경우가 많다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운 좋게도 날이 맑았고 바람도 거세지 않아서 돌아보기 적당했다.


곶의 입구에는 안내소와 주차장이 있었고, 주차장 뒤쪽으로 유명한 호카곶의 등대가 눈에 띄었다. 대서양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배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대륙의 등대에 얼마나 반가웠을까? 짙은 주황색 지붕에 하얀 건물로 지어진 등대가 파란 하늘과 바다, 누런 절벽 위의 초록 들판과 어우러져 엽서의 한 장면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20여 년 전, 캐나다의 핼리펙스(Halifax) 근교에 있는 패기스 코브(Peggy's Cove)라는 마을에 갔었는데, 거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끝부분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는 등대가 있다. 한적한 등대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육지의 끝에 왔다는 감동이 있었는데,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유럽의 끝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섰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호카곶의 등대. 호카곶 기념탑으로 가던 길에 바라본 모습


제주도의 섭지코지가 생각나는 호카곶은 바다까지 절벽의 높이가 약 100미터에 이른다. 대서양의 바닷물은 청록색으로 빛나며 강한 파도와 함께 절벽 아래서 부서지고 있었다. 곶의 진입로는 나무로 만든 펜스로 가이드가 되어 있는데, 펜스 밖으로 나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매년 다수의 사람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는다고 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저 멀리 앞쪽에 호카곶의 기념탑이 보인다. 십자가를 꼭대기에 세운 기념탑은 이 곳이 더 이상 무어인들의 땅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땅이라는 점을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펜스를 따라 기념탑으로 가까이 걸어가 보았다.

호카곶의 기념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절벽 아래서 부서지는 청록색의 파도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호카곶의 기념탑에 선명하게 쓰여 있는 시구절인데, 가만 보니 이를 쓴 사람은 카몽이스이다. 카몽이스가 누구인가? 포르투갈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며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노래했던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아니던가. 벨렝 지구 제로니무스 수도원에는 그의 무덤이 바스쿠 다 가마와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포르투갈의 영광,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 탑)

호카곶의 기념탑에는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카몽이스)', '유럽 대륙의 서쪽 끝 지점'이라고 씌여 있다.


호카곶의 기념탑을 지나서 더 들어가면 반대쪽 해안 절벽의 절경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는 대서양의 푸른 바다가 수평선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고, 왼쪽으로는 넓은 구릉 위로 관목들이 자라는 호카곶의 작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키가 성인의 허리춤 위로 올라오는 나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 얼마나 바람이 심한지 짐작할 수 있다.

호카곶의 절경
구릉 위 관목들 사이에 선 아들


구릉 뒤로 저 멀리 작은 마을이 보였다. 그곳이야말로 땅끝 마을이었다.

농사를 짓기도 어려워 보이는 이 마을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산책로를 걷다 보니 한 시간 가량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호카곶의 땅끝 마을


오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문득, 호카곶의 산책로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하루하루 아등바등하면서 작은 일에 신경 쓰고 지내던 일상이 덧없게 느껴졌다. 바다는 그런 곳인데, 대륙의 끝에 서 있다는 감상까지 더해져 말은 없어지고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게 된다.

호카곶 산책로와 대서양


리스본까지 가야 할 길이 좀 되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더니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방금 출발해 버렸고, 카스카이스 방향으로 가는 다음 버스는 1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짜증이 나기보다는 웃음이 나서 아이들과 정류장 근처 풀밭에 그냥 앉아버렸다. 굳이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다음 버스를 타면 될 일이었다.


한적한 세상 끝 호카곶은 그렇게 나에게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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