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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May 24. 2020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를 둘러싼 전설과 역사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지킨 자연의 나라, 스위스로 떠나는 가족여행 #8

스위스 가족 여행의 마지막 일정, 취리히의 날이 밝았다.

엄청나게 비싼 숙박료를 아끼고자 시 외곽에 위치한 테크노 파크 단지 내의 호텔로 숙소를 잡았는데, 이곳으로 정한 또 다른 이유는 조식이 괜찮다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아침밥을 잘 먹자는 것이 신조인 나는 일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엄청 무거워진 발을 끌고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호텔의 아침 뷔페식당은 그야말로 시장통이 따로 없어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아침밥다운 밥을 며칠 만에 먹는 셈이어서 가족들과 함께 과일이며 요구르트, 계란이며 치즈, 크라상 등을 가져와 앉았다. 커피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진한 블랙커피를 두 잔 마셔가며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동선을 정리했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뇌를 카페인이 각성시켜 주었다.  


전날 밤, 저녁식사 후에 아이들과 이번 여행에 대한 평가의 시간을 가졌는데, 딸이 알프스 여행에 대해 별을 1개(5개 만점)만 부여하는 충격을 주었던 터라 마지막 날에 이를 만회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숙제였다. 독서와 인스타그램, 그림 감상을 좋아하는 사춘기 여학생을 알프스 고산으로 끌고 올라갔으니 혹평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런던으로 복귀하는 저녁 비행기 시간을 감안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반나절 남짓, 비가 갠 서늘한 날이라 걷기도 좋은 만큼 그로스뮌스터와 그 주변의 구시가 중심지를 돌아보고 마지막 일정으로 쿤스트하우스(취리히 미술관)에 가보기로 했다. 미술관에 간다고 하니 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취리히 구시가의 그로스뮌스터와 쿤스트하우스 (구글 위성사진 캡처)


체크 아웃을 마친 후 모든 짐을 차에 싣고 리마트 강과 취리히 호수가 만나는 구시가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목적지로 잡아 둔 시내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교차로가 일정치 않아 헷갈리는 데다 트램 노선과 버스 전용 차선, 자동차 길이 한데 섞여 있어서 길을 잘못 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전날도 좌회전을 하다 무심결에 트램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식겁했는데 이날은 교차로 제일 앞에서 신호 대기 후 좌회전을 하면서 버스 전용 차선으로 진입해 맞은편의 시내버스로부터 경적과 하이빔을 맞기도 했다. 시내 도로는 왜 이리 좁은지 한번 잘못 진입하면 유턴할 곳을 찾기도 까다로웠다. 한참 헤맨 끝에 쿤스트하우스 근처의 지하 주차장으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로스뮌스터와 쿤스트하우스가 모두 도보 거리라서 공항으로 가기 전에 다시 차를 꺼낼 일은 없었다.


순교자의 무덤,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

취리히의 랜드마크로 리마트 강가 나지막한 언덕에 서 있는 그로스뮌스터(거대한 사원, 교회당이라는 뜻)는 취리히의 4대 기독교 개혁 교회 중 하나로 중세 종교개혁 이후 스위스 개신교의 예배당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교회의 터는 취리히의 수호성인인 펠릭스(Felix)와 레굴라(Regula)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불어로 샤를마뉴 - Charlemagne)가 타고 있던 말이 리마트 강가의 그들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어 카롤루스가 그 자리에 수도원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로스뮌스터


취리히에서 만난 의외의 인물, 카롤루스 대제란 누구인가.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중유럽의 여러 국가 중 게르만 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이 있었다.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을 크게 확장한 카롤루스 1세는 유럽을 침략하던 이슬람의 세력을 저지하고,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족을 정복하여 교황령으로 바치는가 하면 독일의 작센족을 정복하여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등 여러 세력으로 쪼개져 있던 서유럽을 실질적으로 통일하면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인의 수호자' 즉, 서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융성하던 동로마(비잔틴 제국) 제국에 비해 일찌감치 멸망한 후 분열되고 혼란스럽던 서로마 제국 일대를 다시 평정한 데다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카롤루스였으니, 비잔틴 제국과 정통성 문제로 대립하던 로마의 교황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고마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카롤루스 대제의 초상과 814년 프랑크 왕국의 최대 판도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정치와 더불어 문화와 예술, 농업과 종교의 부흥을 이끌며 서유럽을 안정시킴으로써 '유럽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는 특히 교회와 수도원을 곳곳에 설립하여 정복지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힘썼다. 2미터에 가까운 큰 키와 다부진 체격, 흰머리와 풍성한 흰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야말로 대제(大帝)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나폴레옹마저 프랑스의 황제에 오르면서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을 흉내 내지 않았던가. 카롤루스 대제는 거의 평생 동안 전장을 누볐다.

이런 위대한 황제가 직접 정한 교회터이기 때문일지 몰라도 그로스뮌스터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흔적이 뚜렷하다.


한편, 카롤루스 대제 치세 때 통일 왕국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프랑크 왕국은 그의 사후에 3개의 왕국으로 쪼개졌다(동/중/서프랑크 왕국). 지형적으로 동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독일, 중프랑크 왕국은 이탈리아, 서프랑크 왕국은 프랑스의 모태가 된다.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 (by Friedrich Kaulbach 1861, 출처 위키피디아)


취리히의 수호성인인 펠릭스와 레굴라에 대한 종교적 전설은 매우 극적이다. 남매 사이였던 펠릭스와 레굴라는 로마 제국 테베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이었는데 취리히까지 도망 왔다가 잡혀 처형당한 순교자이다.


레기온(Legion) 즉, 로마의 '군단'은 방대한 제국의 확장과 방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로마군의 편제로 각 군단은 6천 명의 중무장 기보병과 수천 명의 보조병으로 구성되었다. 테베 군단은 이집트 테베 출신(그리스의 테베가 아님)의 기독교 개종자로 이루어진 군단으로 군단장은 이집트 출신의 마우리시오(Maurice)였다.

3세기 후반 서로마 제국의 부황제(공동집권 황제 중 한 명)였던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 지방에서 바고데(Bagaudae)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투입했는데, 그중 테베 군단을 오늘날 프랑스와 스위스의 접경 지역 알프스에 집결토록 했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군단장에게 로마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명령했으나 마우리시오는 로마에 군사적 충성은 맹세할지언정 하느님 외의 신은 섬길 수 없다고 거부했다.

데시메이션(Decimation; 10명 중 1명의 병사를 다른 9명이 무조건 죽여야 하는 로마군의 처벌 방식)의 처벌에도 불구하고 마우리시오와 군사들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명령을 계속 거부하자 막시미아누스는 6,600여 명에 이르는 군단 전체를 아가우넘이라는 곳에서 처형하였다.(아가우넘의 순교자 - Martyrs of Agaunum)

성 모리스(St. Maurice) (by Matthias Grünewald, 16세기. 출처 : 위키피디아)


황제는 명령을 거부하는 군대가 또 다른 반란군이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종교적 신념이 있었다 해도 6천 명이 넘는 군인들이 모두 처형되었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수천 명이 기꺼이 순교하지 않았던가.

마우리시오 장군과 테베 군단이 순교한 아가우넘은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St. Maurice)라 불리는 곳으로 사후 시성(諡聖)된 마우리시오를 기리는 지명이다.


테베 군단의 일원이었던 펠릭스와 레굴라는 취리히에서 잡혀 참수형을 당했는데, 처형당한 후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40미터가량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가 기도한 후 죽음을 맞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 자리에 지금의 그로스뮌스터가 서 있는 것이다.

예수와 펠릭스, 레굴라 그리고 엑수페란티우스(1506년) (출처 : 위키피디아)


츠빙글리 종교 개혁의 중심, 그로스뮌스터

그로스뮌스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이 바로 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자 구심점으로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마지막까지 설교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취리히 시의회에서 있었던 가톨릭 특사와의 공개토론에서 승리하여 의회로부터 종교개혁의 당위성과 권위를 인정받은 츠빙글리의 사상은 취리히에서 스위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나, 산악 주(칸톤)들의 산업 기반인 용병업과 숙박업까지 금지하는 과격함 때문에 큰 갈등을 일으킨다.

결국 스위스에서 종교문제로 내전이 터지고 카펠 전투에서 츠빙글리는 사망하고 만다.(취리히에서 엿본 험난한 스위스 독립의 역사)


서기 1100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완성까지 대략 100여 년이 걸렸던 그로스뮌스터는 중세 시대 취리히의 중심이었고 근현대까지 지속적으로 개보수가 이루어져 왔다. 부드러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당의 전면부에는 취리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쌍둥이 탑이 약간 다른 스타일로 서 있다. 원래는 15세기 말에 목재로 건설된 탑들이었는데 1763년에 화재로 무너져 1787년에 신고딕 양식으로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둘 중 남쪽에 있는 탑을 카를스튜엄(Karlsturm; 카를의 탑)이라고 하는데 이 탑은 내부에서 계단을 타고 탑 위로 올라가 취리히의 전망을 감상해볼 수 있다. '카를'이란 카롤루스 대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탑의 한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그의 동상이 보인다.

리마트 강의 다리에서 바라본 그로스뮌스터의 전경
카를스튜엄에 올려져 있는 카롤루스 대제의 동상 (왼쪽 사진의 출처는 위키피디아)


그로스뮌스터는 실외뿐 아니라 실내 역시 화려한 가톨릭 성당과 다르게 굉장히 검소해서 금욕의 장소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인테리어는 취리히 국립 박물관을 디자인했던 구스타프 굴(Gustav Gull)에 의해 1913년에 개조된 것이다. 교회당에는 12-13세기에 건설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지하 묘지와 15세기에 만들어진 카롤루스 대제의 좌상을 볼 수 있다.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뜬 황제의 동상이 마치 우리나라 사찰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4대 천황 같아서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교회당은 현대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개조와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어, 스위스 미술가 아우구스토 쟈코메티(Augusto Giacometti)가 1932년에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나 독일의 조각가 오토 뮌흐(Otto Münch)가 비슷한 시기에 설치한 청동문 등의 작품들이 천 년이 넘은 교회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박물관에 있거나 원형 보존만 중시되는 우리의 문화 유적 관리와 달리, 유럽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많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눈으로만 감상할 수 있었다.

교회 지하에 있는 카롤루스 대제의 동상(좌)과 쟈코메티의 스테인드 글라스(우,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꼭대기에 올라 취리히 시내와 알프스까지 조망해 볼 수 있는 ‘카를의 탑’은 고딕 성당의 종탑만큼 높지는 않으나 인상적인 디자인 덕에 족히 취리히의 상징으로 꼽힐만하다. 정상까지는 교회당 내부에서 출발해 187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중간에 창문이 나 있는 넓은 방이 있어 등반이 힘든 사람들은 쉬엄쉬엄 올라갈 수 있다.

 

헉헉대는 아이들을 격려해 가며 탑 위에 올라서니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운데 오른쪽으로는 리마트 강을 따라 아름다운 취리히의 시내가, 왼쪽으로는 넓은 취리히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임에도 몇 킬로미터 밖까지 시야는 확 트여 있었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정해놓은 듯 취리히 구시가지의 건물들은 모두 암갈색의 지붕을 덮고 있는 가운데 강 건너 맞은편에 청록색 첨탑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 건물은 그로스뮌스터와 쌍벽을 이루는 취리히의 교회 프라우뮌스터(Fraumünster)이다.

카를의 탑에서 내려다본 취리히 시내. 왼쪽에 프라우뮌스터의 뾰족한 시계탑이 보인다.
카를의 탑에서 내려다본 취리히 시내. 왼쪽에 보이는 시계탑은 성 베드로 교회.


탑의 왼쪽에 보이는 취리히 호수는 구름을 살짝 뚫고 비추는 아침 햇살을 받아 신비롭게 보였다. 거대한 바나나처럼 생긴 취리히 호수의 물은 리마트 강이 되어 취리히를 지나 독일의 라인강으로 합쳐진다. 호수를 낀 도시가 주는 여유로운 풍경은 참 매력적이다.

카를의 탑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취리히 호수의 전경


탑을 내려와 교회 안뜰로 나왔더니 그로스뮌스터의 청동 모형이 뜰 가운데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이 만져서 탑 윗부분이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도는 이 모형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만져보고 교회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로스뮌스터에서 나온 우리는 리마트 강 위의 다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전날에 이 다리 건너편에 있는 길거리 주차장에 차를 세웠었다는 기억이 났다. 그때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우중충한 날이어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짙은 청록색의 맑은 강 위로 떠가는 배와 더불어 고풍스러운 도시 풍경은 참 잘 어우러진다.

리마트 강 위를 떠가는 배


다리를 건너며 가까이서 보니 아까 그로스뮌스터의 탑에서 봤던 청록색의 첨탑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프라우뮌스터(Fraumünster)로 불리는 이 교회는 그로스뮌스터만큼 역사가 오래된 곳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이자 동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인 루이 2세(Louis II)가 자신의 딸을 위해 서기 853년에 지은 수녀원이 그 시초이다. (그래서 교회 이름도 프라우뮌스터 즉, '여자의 수도원'이다.)


프라우뮌스터 수녀원장은 13세기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레데릭 2세 황제로부터 독립성을 부여받아 시장 선출에 관여하거나 통행료 징수, 화폐 관리 등 실질적인 통치권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16세기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따라 수녀원은 해체되고 개혁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라우뮌스터의 전경


정작 프라우뮌스터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로스뮌스터와 달리 여기서는 입장료를 따로 받고 있는데 교회당 내 성가대 쪽에 있는 5개의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바로 20세기 위대한 예술가 마르크 샤갈(Marc Shagall)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태생이나 프랑스, 미국 등 여러 곳에서 활약한 천재적 예술가 샤갈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릴 만큼 환상적인 색감과 몽환적인 작품이 특징이다.


프랑스 니스의 샤갈 박물관에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작품을 감상했던 기억이 있어 프라우뮌스터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아이들이 극렬히 반대했다. 그로스뮌스터도 힘들었는데 무슨 뮌스터에 또 들어가냐면서 가려면 아빠만 혼자 가라고 반란이 일어난 것.


이후 일정이 미술관이기도 하고 샤갈의 작품은 예전에도 충분히 보았던 데다 시간도 촉박해 내가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프라우뮌스터는 샤갈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비록 프라우뮌스터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날 오후 취리히의 마지막 일정인 미술관에서 샤갈의 환상적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프라우뮌스터 내 샤갈의 스테인드 글라스 (사진 출처 : www.zueri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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