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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Jun 21. 2020

시간이 빚어낸 흰색의 아름다움, 세븐 시스터즈

남부 잉글랜드의 백악 절벽에 서다

백악의 절벽으로 가는 길

"얘들아, 우리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에 가보자!"

"하하~ 칠공주도 아니고 칠자매? 이름이 왜 그래요?’

영국에 온 지 일 년을 넘긴 어느 여름날, 환상적인 북유럽의 여름이 막바지로 달려가며 조금씩 짧아져 가는 해가 아쉬웠던 나는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잉글랜드 남쪽의 해안 절벽에 가보자고 가족들을 꼬드겼다. 마침 런던 생활도 안정되어 가던 때였고, 세븐 시스터즈는 여름이 지나면 날씨가 험악해져 아이들과 같이 가기에 위험할 것 같아 '이때가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곱 자매, 이름도 재미있는 세븐 시스터즈는 잉글랜드 남쪽 서섹스(Sussex) 지방의 이스트본(Eastbourne)과 시포드(Seaford) 사이를 잇는 백색의 해안 절벽을 통칭하는 말로 7개의 절벽 봉우리가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에서도 영국인 특유의 위트가 느껴진다.


세븐 시스터즈의 절벽은 왜 유명할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열심히 읽어줬던 공룡 책 속의 기억을 끄집어 내 본다. 영화 쥐라기 공원 덕에 중생대 중기 쥐라기 때부터 지구 상에 공룡이 번성했다는 점은 누구나 알 것이다. 쥐라기 이후 지금으로부터 약 1억 4천만 년 전부터 8천만 년 동안 지속된 중생대 말기 지질시대를 백악기라고 부른다.


백악(白堊;Chalk) 즉, '흰색의 흙'이라고 알려진 지질은 칠판에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분필의 원료로 석회질의 암석이다. 백악기 시기에 지구는 아주 따뜻해서 해수면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 대륙의 저지대는 얕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었고, 화산 활동이 활발해서 이산화탄소가 많이 분출되었으며 공룡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기 넓고 깊은 바다에서 살았던 조개와 산호류의 껍질 성분인 탄산칼슘이 수천만 년 동안 퇴적되어 생성된 석회암 지층을 백악이라고 하며, 그 특징이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세븐 시스터즈이다. 이 곳을 포함한 영국 동남부와 프랑스 북부 지역에 나타나는 지질을 초크 그룹(Chalk Group)이라고 부르는데 백악기라는 단어는 여기서 유래했다.


영국에서는 석회질 때문에 수돗물을 그냥 마실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일반 식당이나 가정집에서 쓰는 중대형 정수기도 잘 쓰지 않는데, 정수기 관에 쌓이는 석회질을 청소하는 게 여간 번거롭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런던 집에서는 수돗물을 늘 브리타 정수기(투명한 물통 모양)에 받아 걸러 마셨는데, 물통 외부에 묻은 물방울들은 반나절만 지나도 하얀 석회가루로 변하기 일쑤였다.

영국에서는 또 화장실에 비데가 있는 곳을 본 기억이 없는데, 비데의 수관이 석회질로 막힐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납득이 된다. 샤워부스의 유리벽도 석회질로 하얗게 변해서 특수 세제로 늘 닦아야 하니 말해 무엇하리.

수돗물을 편하게 받아 쌀을 씻어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가 복 받은 나라이다.


먹는 물의 품질로 보면 불행한 땅이지만 석회질의 지층이 바다와 만나 오랜 시간 빚어낸 아름다운 풍경은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세븐 시스터즈는 그 특유의 아름다움 덕분에 단골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1991년 영화 로빈후드(Robin Hood : Prince of Thieves)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케빈 코스트너가 '집에 왔다'라고 소리치며 누웠던 해변이 세븐 시스터즈이고, 한 소녀의 거짓말 때문에 발생한 비극을 다룬 영화 어톤먼트(Atonement, 2007년)에서 소설가가 된 브리오니가 언니 세실리아와 언니의 이루어지지 못한 연인 로비를 위해 소설 속에서 해피 엔딩을 그렸던 장소도 세븐 시스터즈이다. 제임스 맥어보이(James McAvoy)와 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ey)의 가슴 울리는 연기가 생각난다.

영화 어톤먼트의 엔딩 장면 (Youtube 캡처)


여름의 주말 아침, 세븐 시스터즈를 가기 위해 런던에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브라이튼(Brighton)으로 향했다. 남쪽의 해변 휴양도시 브라이튼은 런던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 남짓 달리면 닿는다. 영국에 온 지 두 달가량 지났을 때 향수병에 시달리던 둘째가 '바다가 보고 싶다'라고 했을 때 다녀오기도 했던 곳이다.

여전히 차 없이 여행을 다니던 우리는 브라이튼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세븐 시스터즈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기차의 나라답게 영국에는 전국적으로 기차 망이 잘 발달되어 있다.  


브라이튼의 시내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기차역 근처에서 조금 기다려 빨간 버스에 올랐다. 아이들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2층 데크의 제일 앞자리에 냉큼 자리를 잡았다. 이때만 해도 버스 위층의 제일 앞자리를 놀이기구만큼 좋아했던 아이들, 지금은 시큰둥해져서 아래층에 서서도 간다.

버스 안에서 양팔을 높게 올리고 신난 아이들


브라이튼을 빠져나온 버스는 해변의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 저 아래 보이는 푸른 바다 건너편은 북부 프랑스의 노르망디.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은 유럽 대륙과 밀당을 벌였던 오랜 역사가 있다. 브렉시트(Brexit)를 계기로 유럽 대륙을 다시 저만치 밀어내고 있는 영국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버스가 40여 분 가량을 달려 세븐 시스터즈 지역 중간에 있는 벌링 갭(Birling Gap)에 도착했다. 사실, 세븐 시스터즈 조망은 벌링 갭보다는 브라이튼에 가까운 서쪽의 쿡미어 헤이븐(Cuckmere Haven)이 더 나아 보인다. 쿡미어 헤이븐은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으로 세븐 시스터즈의 높고 화려한 흰색 절벽과 그 앞의 해안경비대 거주지(Coastgaurd Cottage)가 어우러져 풍경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영화 어톤먼트의 엔딩 장면 배경이 바로 쿡미어 헤이븐이다.


하지만 우리는 버스 루트에 따라 제한적인 동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쿡미어 헤이븐까지는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하는 반면, 벌링 갭에서는 버스 정류장에서 절벽 위로 바로 걸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진작에 벌링 갭을 목적지로 정해 둔 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쿡미어 헤이븐 앞에서 우르르 하차했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리지 마~ 다음 역이야!'라고 외쳤다.


그럴 때마다 딸은 '아빠는 어떻게 처음 가는 곳도 다 아느냐'며 놀라곤 한다. 20여 년 전에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도 찾아다녔는데 스마트폰이 다 알려주는 요즘 세상에 이건 일도 아니란다.

벌링 갭의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흐렸지만 다행히 바람은 심하지 않았다. 강풍이 불면 위험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없는 곳이 세븐 시스터즈이다.


절벽 위의 풍경

세븐 시스터즈는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로 등록되어 관리되는 자연보호 지역이기도 하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주요 유적지와 빼어난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비영리 재단으로 활동 역사만 120년이 넘는다. 여기에 등재된 지역만 다녀도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영국의 웬만한 유적지와 아름다운 자연을 대부분 돌아볼 수 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휴게소와 카페를 지나 왼쪽으로 나 있는 길을 걸어 절벽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 길을 사우스 다운스 웨이(South Downs Way)라고 하는데, 동쪽의 비치 헤드 등대(Beachy Head Lighthouse)부터 서쪽의 쿡미어 헤이븐까지 세븐 시스터즈 절벽을 따라 도보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트래킹으로 전체를 걸으려면 3시간가량 소요될 것 같다.  

절벽 위로 향하는 가족


건물들이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 않던 해안 절벽들은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파랑이 일렁이듯 굴곡지며 이어진 백색의 절벽 위로 짙은 초록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위를 잿빛 구름의 하늘이 덮고 있는 풍경은 저절로 탄성을 불렀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장엄한 광경이다. 영화 속 절벽 배경이 CG가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을 만큼 비현실적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니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맑은 날 파란 하늘 아래라면 더욱 환상적일 것 같다.

벌링 갭 위에서 바라본 세븐 시스터즈(쿡미어 헤이븐 방향)


절벽에서 바다를 등지고 돌아보면 전형적인 월드(Wold)가 펼쳐진다. 월드란 잉글랜드의 시골에 많이 나타나는 지형으로 낮은 구릉과 높은 언덕, 넓은 계곡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 백악기에 쌓인 석회암층이 빙하기를 거치며 깎여 만들어진 이 지형은 잉글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과거로 가는 시간여행, 영국 코츠월드)

벌링 갭과 세븐 시스터즈 전경


절벽 위 들판 한가운데 작은 벤치가 하나 있어 앉아 천천히 둘러보았다. 초록색 구릉이 앞으로 달려가다가 바다를 만나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깎여 떨어지고 있는 풍경은 마치 바다가 들판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흰색의 석회질 땅은 무른 데다 물에 매우 약하다. 원래 이 지역은 지금보다 바다 쪽으로 200미터 이상 더 돌출되어 있었는데 파도에 의해 계속 침식되고 있다고 한다. 수천, 수만 년이 흐르면 지금 보이는 아름다운 절벽도 모두 깎여 바닷속으로 사라질 테니 세월이 무상하다.


풀밭이 살짝 파여 흰색 암반이 드러난 땅 곳곳에 하얗고 물렁물렁한 자갈들이 흩어져 있어 만져보니 영락없는 분필이었다. 누나가 작은 돌을 주워 풀밭에 늘어놓아 글씨를 만들기 시작하자 동생도 이에 질세라 열심히 뭔가를 쓴다. 초록 잔디밭 위에다 딸이 자기 이름과 하트를 조합한 ‘캘리그래피’를 만들 동안 아들은 SOS로 구조 요청을 했다. 등반은 그만 하고 바닷가로 가자는 것.


세븐 시스터즈의 절벽은 해수면 위로 수십 미터 넘게 솟아 있지만 절벽 위의 들판과 길에는 별다른 안전장치가 없다. 영국인들은 살던 집조차도 인위적으로 변형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도 외관은 200년 전 빅토리아 시대에 쌓았던 벽돌벽 그대로였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정책도 중요한 이유겠지만 석회질의 무른 땅에 펜스를 세우면 쉽게 훼손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세븐 시스터즈에는 이따금 무심히 서 있는 '절벽 가장자리(Cliff Edge)'라는 표지판만이 유일한 안전 가이드 역할을 한다. 안전 불감증인지 여기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용 인증샷을 찍기 위해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거나 ‘곡예’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 날도 절벽에 걸터앉은 젊은 여자 관광객 때문에 한참 가슴을 졸였다. 몇 년 전에 20대 한국 유학생이 사진을 찍다 60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추락하여 아까운 목숨을 잃었던 뉴스가 났었다. 특히, 바람 부는 날에 세븐 시스터즈는 매우 위험하다.

세븐 시스터즈의 유일한 안전 가이드


역사적인 등대와 아이스크림

우리는 절벽을 따라 이어진 오르막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바다를 보며 왼쪽으로 구릉을 올려다보니 멀리 언덕 위에 등대가 보였다. 이 지역은 영국 남쪽 해안선 중에서도 유럽 대륙 쪽으로 툭 튀어나온 곶이나 마찬가지인데, 거기서도 높은 절벽 위 절묘한 지점에서 서 있는 등대라서 왠지 심상찮아 보였다. 이 등대에는 어떤 역사가 있는 걸까?

벨 타우트 등대를 향해 걷는 아내와 딸


유럽의 이류 국가였던 잉글랜드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틀을 다진 왕은 엘리자베스 1세(1558 ~ 1603)였다. 대양 해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가던 그녀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를 꺾기 위하여 유명한 해적 출신의 프렌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를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결전에 나서게 했다.


드레이크의 해적질과 그를 옹호하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신물이 난 스페인은 150척의 전함과 3만 명의 군사로 잉글랜드를 정벌하려 했으나 정작 잉글랜드에는 상륙도 해보지 못하고 프랑스 칼레에서 드레이크의 화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나 이순신의 명량해전에 버금가는 대승으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였다. 영국은 이 해전의 승리를 발판으로 전 세계의 바다를 양분하여 '지배'하고 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출처 : britannica.com)


이후 잉글랜드는 서기 1600년에 설립한 '식민 지배의 앞잡이' 동인도 회사를 통해 새롭게 떠오른 네덜란드와 경쟁을 벌이며 인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광활한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세계 최강대국에 올라섰다.


벌링 갭에서 올려다본 등대는 벨 타우트 등대(Belle Tout Lighthhouse)라 불리는 건물로 지금은 본래의 용도로 쓰이지 않지만 대영제국의 위세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19세기에 세워져 상선들의 항해를 도왔다.

영국이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한 후로 세븐 시스터즈의 해안 절벽 근처에서는 수많은 배들이 좌초했다고 한다. 17세기 이후 등대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실제로 불이 밝혀진 시점은 1834년, 영국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해 본국과 식민지 국가들 간에 통행량이 많아진 시기였다.

벨 타우트 등대
벨 타우트 등대 앞에서 본 벌링 갭 방향


하지만 이 등대는 그리 오래 운영되지 못했다. 등대가 높은 절벽 위에 있었던 탓에 캄캄한 밤에 범선의 미스트에서 보면 실제 거리보다 가깝게 보였던 데다, 등대 가까이 접근하면 절벽에 가려 불빛이 보이지 않아 효용성이 많이 떨어졌던 것. 결국 1902년, 이 등대로부터 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절벽 아래 바다 위에 새로운 등대(비치 헤드 등대; Beachy Head Lighthouse)가 건설되면서 벨 타우트는 등대로서의 운명을 마쳤다.

영국 해협에서 바라본 벨 타우트 등대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등대 건물은 그 뒤로 백여 년간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B&B(Bed & Breakfast)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 같으면 헐어버릴 만도 하건만 전통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고집은 대단하다. 1999년에는 절벽의 침식 위험이 커져 등대 건물을 통째로 들어서 20여 미터 뒤로 옮겼다고 한다. 앞으로도 절벽이 깎여나가 땅이 뒤로 후퇴하면 동일한 방법으로 들어서 옮기면 될 테니, 역사적인 건물을 헐어버릴 위험은 없을 것 같다.


등대 건물 아래에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카페가 있었다. 두어 명이 들어가면 돌아설 틈도 없을 정도로 좁았으나 뜻하지 않았던 즐거움이라 아이들이 좋다고 방방 뛰었다. 여느 구멍가게와 다를 바 없는 아이스크림 가게였지만 독특한 장소의 역사적인 공간이 주는 색다른 맛이 있다.

벨 타우트 등대의 아이스크림 집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동안 등대 건물 너머 동쪽 방향을 보니 멀리 높은 절벽이 이어져 있고, 그 앞의 바다 위에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가 선명한 기둥이 하나 보였다. 이 기둥 같은 건물이 앞서 이야기했듯 벨 타우트의 등대 기능을 100년 전에 대체한 비치 헤드 등대이다.

비치 헤드의 절벽은 세븐 시스터즈에서 가장 높아 보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절벽 위로 걸어 오르고 있었다. 그곳까지 한번 걸어가 보는 게 어떠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먹던 아이들이 급격히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는 여기 있을 테니 아빠 혼자 다녀오세요.'

벨 타우트 등대에서 바라본 비치 헤드 등대와 절벽


바다 위에 세워진 비치 헤드 등대는 밀물과 썰물의 흐름에 따라 물속에 잠겼다가 물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썰물이 되어 등대가 완전히 물 밖으로 나오면 등대까지 사람들이 걸어가기도 하는데, 이스트본 지역에서는 등대까지 걸어가기 자선 기부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오래된 등대 하나에도 역사를 존중하고 그에 의미 있는 스토리를 부여하는 이들의 사고방식은 배울 점이 많다.

바다에서 바라본 비치 헤드 등대의 모습 (사진 출처 : dronstagram - By markyboy79, 2017)
벌링 갭 - 벨 타우트 등대 - 비치 헤드 등대의 위치 (구글 위성사진 캡처)


한편, 벨 타우트 등대는 벌링 갭보다 높은 절벽 위에 있어 절벽의 가장자리에 섰을 때 더 큰 공포를 준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절벽 가장자리까지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가서 사진을 찍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일어서서 다가가기엔 다리가 후들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도 용기를 내 등대 건물 근처에서 절벽의 에지까지 발걸음을 옮겨 보려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흰색의 석회암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절벽 끝까지 3-4미터를 남겨 두고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 안전을 극도로 중시하는 아들이 나에게 그만 가라고 소리칠 정도였다.

절벽이 무서워 기어서 접근하는 사람들
벨 타우트 등대 앞의 절벽


벨 타우트 등대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우리는 발걸음을 벌링 갭으로 되돌렸다.

올라갈 때와는 달리 하얀 절벽을 내려다보며 걸으니 개방감에 더욱 상쾌했다. 짙었던 먹구름도 서서히 옅어져 갔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보다 사람도 늘어서 넓은 구릉에는 아이들이 많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등대를 뒤로 하고 다시 내려가 본다.


절벽 아래로

벌링 갭에는 절벽 아래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으로 이어진 난간에 서서 양쪽을 보니 바다에 맞서다 깎인 백색 절벽의 장관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그와 함께 인상적인 것은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건물들이다. 침식이 더 일어나면 저 건물도 등대처럼 번쩍 들어서 옮길지 궁금하다.

계단 아래 해변의 자갈밭에는 사람들이 앉아 주말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갑자기 구름을 뚫고 해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 바닷물의 색깔은 맑지도 파랗지도 않은 회백색을 띠고 있어 절벽을 때리는 파도마저 석회질 성분이 녹아 있는 듯하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난간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해변으로 내려가는 난간에서 바라본 서쪽 방향


마침 썰물 시간대였던지 물이 빠지고 있었다.

바닷물에 들어가기엔 쌀쌀해서 아내와 딸은 햇볕이 따뜻하게 데워 둔 자갈밭 위에 앉아 쉬기로 했고, 물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아들은 바다를 향해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갔다. 사실, 아들은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바닷가부터 가자고 졸랐던 터라(SOS 글씨를 쓸 때부터였다), 이제야 신난 아들의 뒷모습에 여기서 앞으로 두세 시간은 족히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백색 절벽을 배경 삼아 온통 자갈밭으로 이루어진 해변은 마치 다른 행성 같았다. 가까이서 올려다본 수십 미터의 절벽은 미드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장벽(The Wall)을 떠올릴 정도로 위압적이다.

세븐 시스터즈 절벽 아래 해변


바닷물이 더 빠지면서 해변은 점차 색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전에 절벽의 일부였다가 떨어진 듯 하얀 석회암 덩어리들은 파도에 닳아 동글동글한 모습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고, 그 뒤로는 녹색 해초로 뒤덮인 바위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가 드러난 흰색의 암반은 우리가 서 있는 해변 역시 절벽과 같은 땅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화산암으로 뒤덮인 ‘검은 해변’에 놀랐었는데, 이 곳은 반대로 ‘하얀 해변’이니 같은 지구에서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할 뿐이다. (용암과 바다와 시간이 만든 걸작, 검은 모래 해변)

썰물로 바닥이 드러난 세븐 시스터즈의 해변
물속에 잠겼던 땅도 흰색이다


아이들에게 절벽을 따라 조금 걸어 보자고 했다. 자갈의 해변을 지나니 물 빠진 곳에 조간대(潮間帶) 같은 지형이 드러나 눈길이 간다. 작은 해양 생물이라도 잡으려는 듯 동네 꼬마들이 죄다 바닷물 웅덩이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흘러 들어오는 강이 많고 수심이 얕으며 갯벌이 발달한 우리나라 서해라면 게나 조개, 해삼, 고둥 같은 바다 생물이 풍부할 텐데 여기는 생물들이 눈에 잘 뜨이지 않았고 짠내나 비릿한 바다 냄새도 거의 없다.

세븐 시스터즈의 해변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나오면서 높이 솟은 해안 절벽은 더욱 하얗게 도드라졌다. 흰 절벽의 지층도 나이테처럼 줄로 구분되어 있어 흘러간 세월을 실감한다. 한 칸의 지층을 쌓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학자들은 지구 환경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 인류의 시대를 하나의 지질 시대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현생 인류가 살았던 모든 시간을 합친다면 저 지층의 어느 정도 두께와 비슷할지 궁금했다.

지층이 뚜렷한 세븐 시스터즈의 흰 절벽


영국의 여름날은 해가 길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웅장한 절벽과 트인 바다 사이를 걷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늦지 않게 버스를 타기 위해 아쉽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돌아가는 버스가 1시간에 한 대 꼴이라 갈길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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