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로 떠나는 가족여행 #4
전날 골든 서클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었다.(싱벨리어와 게이시르, 황금 폭포 굴포스)
아이들이 ‘또 폭포에 가느냐!'며 살짝 항의를 했지만, 이미 당일치기로 아이슬란드 남서부 해안가를 돌아보기로 결정한 터. 오늘의 반환점은 검은 모래로 유명한 레이니스피야라 Reynisfjara 해변이었고, 해안 도로를 끼고 있는 두어 개의 폭포도 가 볼 예정이었다. 목적지를 검은 모래 해변까지로 정한 이유는 날씨와 가족들의 컨디션을 감안할 때 거기까지가 한계라고 봤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는 국토의 크기가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내륙의 대부분은 빙하와 황무지로 덮여 있어 승용차를 몰고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대부분 해안 도로 근처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섬을 완전히 한 바퀴 도는 도로를 링 로드(Ring Road)라고 부른다.
여행을 와서야 깨달았지만, 아이슬란드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일주일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작은 화산섬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광활한 외계 행성이나 다름없는 느낌이다.
여름에는 내륙의 화산지대와 빙하지대를 트레킹 할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아이슬란드를 찾는다. 실제로 아이슬란드의 트레킹 코스 안내 사이트들에 가보면 당장 내일이라도 짐 싸서 가보고 싶은 풍경들을 보여준다. 언젠가 늦기 전에 아이슬란드 빙하 지대에 꼭 한번 와서 캠핑을 하며 걸어보리라 다짐해 본다.
이 날은 4륜 구동 차량을 빌리지 않았던 게 가장 아쉬운 날이었다.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중간에 빙하 제대로 올라가려 했으나, 거친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망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5분 만에 차를 돌렸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4륜 구동 SUV를 빌려야 한다.
전날, 런던보다 30%가량은 비싼 살인적인 생활 물가를 실감한 우리는 근교 슈퍼마켓에서 간단히 요기할 것들을 사서 남쪽으로 출발했다. 레이캬비크 근교를 막 지나면서부터는 도로 양쪽에 펼쳐지는 특이한 풍경에 운전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화산섬답게 곳곳에 보이는 지열 발전소에서는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처음 보는 화산암 지대는 길 옆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구릉지대가 끝나고 남서쪽 해안으로 진입할 때는 특이한 지형에 입을 쩍 벌렸다.
용암이 흐르다 쌓여 멈춘 대지를 비바람이 깎았을까, 레이캬비크에서 1시간가량 달리다 보면 해안 쪽으로 갑자기 지대가 급격히 낮아지며 장관이 펼쳐졌다. 우리나라도 동해안에 가려면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지만, 평지에서 산을 넘어 다시 평지로 내려서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항구인 레이캬비크에서 지금까지 난 평지를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해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아마, 완만히 상승하는 구릉을 달려오느라 미쳐 고도가 상승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나 보다.
나중에 해안가에 있는 스코가 폭포에 가보고 나서 지형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는 제주도가 유일한 화산섬이다. 분화구가 멋진 성산 일출봉이야말로 대표적인 관광지가 아닌가. 아이슬란드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 셀 수 없이 많은 '성산 일출봉'을 만나게 된다. 화산 활동으로 섬이 생길 때,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분화구가 형성된 것. 실제로 아이슬란드에는 휴화산이 1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길가의 ‘일출봉’들과 멀리 절벽에서 떨어지는 이름 모를 폭포를 바라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눈 앞에 셀얄란드스포스가 나타났는데, 아쉽게도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나라의 날씨야 자주 변하므로 금방 그칠 것이라고 기대했었지만, 이날 오전만큼은 비가 쉽게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 위는 파란 하늘인데, 희한하게 우리가 서 있는 폭포 주변만 잔뜩 먹구름이 끼고 내내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과 폭포의 물보라를 이중으로 맞으며 한 바퀴 돌아보았다.
축축하게 비 맞는 것을 유독 싫어하는 딸이 폭포를 돌아보기 시작한 지 5분 후부터 완전히 심통이 났고, 비가 그칠 무렵인 오후에 방문한 스코가포스 폭포에서는 '그 따위 폭포에는 관심도 없다'면서 아예 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춘기 중 3 여학생과 함께 여행할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에 갔을 때도 여행이라는 단어 자체에 저주를 퍼붓지 않았던가.)
셀얄란드스포스에서는 폭포의 뒤쪽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 폭포 바로 아래서는 비바람과 물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기겁을 하기도 했지만 폭포 뒤 작은 반구의 ‘동굴’에서는 물줄기가 들어치지 않아 오히려 아늑한 느낌까지 받는다. 약간 과장하면 마치 영화 ‘라스트 모히칸’에서 백인들을 피해 폭포 뒤로 숨었던 인디언들이 된 느낌이었다.
폭포의 뒤로 연결된 탐방로는 물보라에 약간 미끄럽긴 했지만 경사는 급하지 않아 걸을 만했다. '동굴'에서는 목소리도 잘 안 들릴 만큼 커다란 폭포 소리에 얼떨떨하다. 아들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더 아래까지 내려가 물보라를 맞고 왔다.
탐방로는 반대편으로 이어져 전망대로 사람들을 이끈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야 하지만 폭포를 좀 더 높은 곳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온몸이 물에 젖은 딸은 이미 패닉에 빠졌다.
날씨만 좋았다면 조금 더 즐기고 싶을 만큼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였지만, 물에 젖어 덜덜 떠는 아이들 때문에 바로 차로 돌아왔다. 계획대로라면 다음 행선지에서도 계속 비가 올 텐데,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아이들을 데리고는 무리일 것 같아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해안 도로 중간의 다른 폭포 지역에도 계속 비가 내린다는 예보를 확인한 나는 빗속에서 더 걷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오늘의 반환점인 레이니스피야라 검은 모래 해변 Reynisfjara Black Sand Beach으로 직행했다.
아이슬란드의 최남단 지역에 위치한 이 해변은 1991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전 세계 비 열대 해변 중 방문해야 할 Top 10' 해변 중 하나로 선정된 바 있는 검은색 모래사장이 유명한 특이한 해변이다.
좁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해변을 향해 5분가량 걸어 나갔더니, 눈 앞에 온통 검은색의 자갈과 모래가 펼쳐져 있고 그 검은 해변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맞고 있었다. '도대체 검은 모래 해변이 뭐길래 그렇게 가려고 하느냐'라고 투덜대던 아이들도 해변 앞에 서더니 입을 쩍 벌리고 환호성을 질렀다.
해변의 검은 모래는 용암이 굳어진 화산암이 바닷물에 부서져 자갈과 모래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산암과 화산사가 만들어 낸 비현실적인 검은색의 해변이 바닷물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폭포가 있던 육지 쪽은 아직 검은 먹구름이 비를 뿌리고 있는데, 바다 위는 하늘이 파랗게 맑았기 때문에 더 신비롭게 보였는지 모른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화산암은 제주도에 많은 현무암이지만, 아이슬란드에는 그 종류만 해도 25종이라고 한다.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진 돌이 그렇게 다양한 종류로 정의되는지 몰랐었다. 아이들은 햇빛을 흡수해 더욱 따뜻해진 검은 모래와 자갈 위에 앉아 한참 동안 젖은 몸을 말렸다. 셀얄란드스포스에서 온 몸이 젖어 심통이 났었던 딸도 그제야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왔다.
섬에서 약간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는 3개의 현무암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들을 레이니스드란가르 Reynisdrangar라고 부른다. 굳어진 용암의 산을 대서양의 매서운 파도가 깎고 깎아 만들어낸 작품이겠지만, 이 돌기둥에는 아이슬란드의 전설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2마리의 트롤과 3개의 마스트가 있는 배 사이에 전투가 있었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2마리의 트롤은 돌이 되었고, 싸우던 배는 트롤들과 함께 영원히 갇혀버렸다고 한다.
요약으로만 찾아봐서 다소 맥 빠지는 내용이긴 한데,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기한 자연물에 이야기를 만들어 붙이는 특성이 있구나 싶었다. 북유럽에도 토르나 오딘처럼 그들의 신들이 있고, 그리스나 로마만큼이나 신화가 풍부한 곳이지 않은가.
이 검은 모래 해변이 더욱 유명한 이유는 주상절리대가 있기 때문이다.
해변의 한쪽에는 나지막하게 화산암으로 된 산이 있고, 그 산의 벽은 온통 주상절리로 덮여있다. 주상절리란 용암이 급격하게 식을 때 육각 모양의 기둥으로 굳어져서 생기는 지형을 말하며 제주도에도 있다.
유동성이 큰 고온의 용암이 식으면 수축하면서 큰 부피 변화가 일어나므로, 최소 변의 길이와 최대 넓이를 가지는 육각기둥으로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육각형은 조밀도가 가장 높은 도형이다. 건축에서도 꿀벌의 육각형 벌집을 연구한다. 바닷물과 만나는 지점에서 용암이 급격하게 식으므로, 해변에 주상절리가 발달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평평하고 조밀하게 쌓여있는 육각기둥으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 방문하면 해야 할 인증샷 같았다. 우리도 올라가 보았는데, 돌산의 중턱까지 올라가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해변에서는 햇볕이 따뜻했지만, 돌아가는 길에 들를 예정인 스코가포스 Skogafoss 폭포는 아직 상황이 어떤지 파악되지 않았다. 검은 모래 해변에서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낸 우리는 온 길을 되짚어 복귀하는 루트로 방향을 잡았다. 딸은 또 폭포에 가면 자기는 절대 차에서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못 박았다. 뒤끝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