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읽고 쓸 것 인가?
1.
박사과정을 밟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결정적인 계기는 글을 쓰는 것에 대해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병행하며 석사과정에 있을 때도 그렇고 영국에 와서 석사 졸업을 하기까지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부담은 없었던 것 같다. 외려 시험에 통과하기 위하 공부하는 것 그리고 시간을 관리하는 부분이 힘들었을 뿐. 정작 글을 쓰기 시작하면 걱정은 사라졌다 (물론 글을 쓸 때 유튜브 보거나 놀 때만큼이나 즐겁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브런치에 나의 생각들을 적고 있는 것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걱정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 주기에 지속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정말 중요한 논문을 작성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키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글을 써서 좋은 점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그 생각의 묶음들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영문으로 사소하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부터 연구계획서 작성 및 논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들을 시작하기 앞서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없을뿐더러 무작정 쓰기 시작한다고 해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한 글쓰기를 하기에 앞서 (계획할 필요는 없지만) 평소에 적은 양이라도 글 쓰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끄적끄적 글을 쓰고 그것을 개인 연습장이던 블로그에 게재하는 것이다. 기왕이면 남들이 볼 수 있는 블로그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에 글을 쓰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개인 일기장처럼 내가 읽기 위함이 아닌 남을 이해시키기 위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평소에 글쓰기를 꾸준하게 하려면 당연한 말이지만 뭔가를 읽어야 한다. 아니 뭘 먹어야 쌀 것 아닌가. 책을 읽는데 크게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첫 번째 방법은 책의 문장이나 단어에 밑줄을 그어가며 요약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내가 기억하고 싶은 핵심지식을 손쉽게 요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단점이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동안 읽는 흐름이 끊겨서 책의 내러티브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두 번째 방법은 내가 선호하는 방법인데 임의로 정해놓은 분량을 끊김 없이 주욱 읽는 방법이다. 읽는 도중에 이해가 좀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그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정해놓은 분량까지는 끝까지 읽는다. 그리고 다시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이나 감명 깊었던 부분을 체크하거나 메모해 둔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서하는 힘이 길러져 일정 시간 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는 연습이 된다. 이 방법을 선호하는 이유는 마치 전자책으로 독서할 때와 종이책으로 독서할 때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보통 전자책은 중간에 하이라이트도 해가며 보기 용이하고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메모할 수 있는 기능이 잘 되어있는 반면 종이책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혹은 귀찮기 때문에) 일정 분량을 읽을 수밖에 없다. 전자책으로 하이라이트를 하며 독서를 하면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지만 결국 머릿속에 남는 것은 진득하게 읽은 종이 위의 정보들이다.
3.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이자 IT 미래학자의 니콜라스 카의 스테디셀러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왜 여전히 종이책 읽기가 유용한 지 추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콘텐츠를 스크린 vs 종이문서를 통해 읽을 때에도 우리의 인지행동은 달라진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스크린 읽기를 할 때 하이퍼링크의 역할은 주요 정보를 최대한 빠르게 독자에게 제공하지만 동시에 독자의 주의를 분산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래는 책의 내용이다.
하이퍼링크 역시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변화시켰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링크를 오랫동안 문서의 보편적인 구성요소였던 암시, 인용, 주석 등의 변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링크를 이용할 때 받는 영향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링크는 단순히 관련 보조 자료의 위치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 자료들이 있는 곳으로 몰고 간다. 링크들은 우리가 이들 자료 중 어느 하나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게 한다기보다는 일련의 문서 사이에서 들어갔다 나가기를 반복하게 한다. 하이퍼링크는 우리의 관심을 끌도록 디자인되었다. 검색 도구로서 그들의 가치는 그들이 발생시키는 산만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p.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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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류의 정보를 하나의 스크린에 모으면서 멀티미디어 인터넷은 콘텐츠를 더욱 분절시키고 우리의 집중을 방해한다 <p. 155>
책에 따르면 전자책의 등장으로 개인이 책을 읽는 방법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적지 않은 독자들이 전자책을 완독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거나 종이책을 읽을 때보다 내용을 기억하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크리스틴과 데이비드의 경험을 들어보자.
워싱턴에 위치한 윤리공공정책센터의 연구원인 크리스틴 로젠은 최근 킨들을 이용해 디킨스의 소설 <니콜라스 니클비>를 읽은 경험에 대해 썼다. "처음에는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이내 킨들의 화면에 적응했고 스크롤과 페이지를 넘기는 버튼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컴퓨터에서 지속적으로 무엇을 읽으려 노력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선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가 가득했다. 나는 위키피디아에서 디킨스에 대해 검색했고 그런 후에는 바로 디킨스의 단편 <머그비 교차로>로 이어지는 링크를 따라 인터넷의 가상세계로 빠져들었다. 20분이 지나도록 나는 <니콜라스 니클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p. 174>
로젠의 투쟁은 역사가인 데이비드 벨이 2005년 새로운 전자책 <나폴레옹식 프로파간다의 기원>을 인터넷으로 읽을 당시의 경험과 동일하다. 그는 <뉴리퍼블릭>에 게재한 글에서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몇 번의 클릭과 함께 글은 예상대로 내 컴퓨터 모니터에 등장했다. 나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 책이 서술 방식이 매우 뛰어난 것은 물론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알아차렸다. 나는 앞뒤고 스크롤하며 키워드를 찾았고 평소보다 더 자주 커피를 가지러 들락거리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뉴스를 확인하고 책상 서랍의 파일을 다시 정리하느라 독서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책을 다 읽었고, 결국 해냈다는 데 기뻤다. 그러나 일주일 뒤 깨달은 것은 읽은 내용을 기억해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p. 175>
나 또한 위의 사람들이 경험한 것과 동일한 경험을 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이왕이면 전자책과 종이책 중 가능하면 종이책을 읽고, 종이책을 읽을 때 조차도 산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중간에 줄을 긋거나 따로 메모하는 것을 최대한 뒤로 미룬다. 일단 습득하고 싶은 정보의 일정한 양을 맥락을 통해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통해 일정한 정보를 깊게 읽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4.
나 같은 경우 위와 같은 읽기 습관이 자연스레 글을 쓰는 방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로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검색해가며 글을 쓸 때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써내려 갈 때 글 자체의 질이 달라진다. 즉 검색이나 레퍼런스를 찾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내 생각이 분명 근거가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단번에 써내려 가는 것이다. 레퍼런스를 찾거나 검색하는 데에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할애해 버리면 정작 글을 쓰는데 필요한 에너지까지 소진되기 때문이다. 여하간 단번에 써내려 가는 방식으로 초안을 작성하면 내 글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찬찬히 뜯어서 다시 읽는다. 그러고 나서 내 의견이 사실에 기반한 글이라면 그대로 두고 근거 없는 이야기라거나 심하게 비약됐다면 그 정보는 삭제한다. 일단 글의 살을 최대한 불렸다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글을 간단하게 추려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와 같은 방법은 논문을 쓸 때도 유용하다. 물론 아카데믹한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레퍼런스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곧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연구윤리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논문을 쓸 때도 내가 평소에 글을 쓸 때의 방법을 그대로 차용한다. 왜냐하면 글쓰기를 할 때 레퍼런스 찾는 것에 너무 혈안이 되면 이야기하듯이 자연스레 나의 비판적인 시각과 논지를 끌고 나갈 수 없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쓴 논문과 비슷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논문은 없는 말을 지어내서도 안되고 엉뚱한 근거로 내 논리를 과도하게 비약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다양한 논문을 평소에 많이 읽어서 소화한 후라면 아카데믹한 글을 쓸 때도 역시 내가 쓰는 글이 근거가 있다고 어느 정도 믿고 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보통 내 생각과 같거나 비슷한 맥락의 연구를 찾을 수 있다.
결국 취미로서의 글쓰기와 논문을 쓰는 일이 다른 것 같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취미로 글을 쓸 때는 굳이 근거를 명시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학술적 글쓰기 덕분에 엉뚱한 이야기나 사실이 아닌 글을 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반대로 논문을 쓸 때는 취미로 글쓰던 습관 덕분에 필요 이상의 레퍼런스로 무장해서 나 자신만의 논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을 방지한다. 결과적으로 서로 판이하게 다른 유형의 글쓰기가 상호 간 호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글을 읽을 때 주의 집중해서 정해진 분량을 한 번에 읽는 연습을 하는 것. 그리고 글을 쓸 때도 자신의 독서량을 믿고 일단 죽 써내려 가는 것이 좋다. 제대로 읽고 한 번에 쓰는 것. 이것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읽기와 쓰기의 규칙이며 이 과정들의 반복이 나의 박사과정을 버티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