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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성 Apr 12. 2021

박사 1년 차 연구 리뷰가 끝났다.

박사 연간 리뷰 (Annual Progress Review)

영국 박사는 수업이 없다. 하지만 매년마다 연구 진행상황에 대해 심사위원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 이를 연간 진행상황 보고 (Annual Progress Review)라고 하는데,  만약 1년 차 박사과정생이라면 지난 1년간 어떤 공부를 했는지,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에 대해 전체적인 리뷰를 하는 것이다.  


지난해 박사를 시작하고 약 15개월가량 지난 후에 연간 리뷰 일정이 잡혔다. 원칙적으로면 12개월 차에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코로나로 인해 학교 상황도 어수선하고 내 한국 일정도 겹쳐서 몇 달이 미루어지게 된 것이다. 여하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5주. 그동안 10,000자가량 (워드 30p 분량)의 리포트를 2주 안에 완성해서 리뷰어 (심사위원) 들에게 보내고 나머지 기간 동안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만들고 발표 준비를 했다.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빨간색으로 하이라이트


첫 번째로 여태까지 조사했던 문헌들을 몽땅 워드에 때려 넣었다. 그리고 수집된 문헌들 의  ABSTRACT (요약) 위주로 훑어보며 어떤 내용으로 리포트를 구성할지 윤곽을 잡았다. 그렇게 레퍼런스를 추리면 그 페이퍼를 읽다 보면 내 연구와 비슷한 주제와 내 생각과 비슷한 논조로 쓰인 연구들을 찾을 수 있다. 그 핵심 페이퍼들의 틀을 기준으로 내 리포트 또한 써 내려갔다.


예를 들면, 도핑에 대한 연구를 읽었다면 그 페이퍼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고, 리포트에 쓰일 것을 예상해서 문단을 합쳐 단락으로 만들어 놓았다. 글의 순서가 맞지 않더라도 나중에 만들어 놓은 단락들을 가지고 마치 퍼즐 맞추듯 순서를 재 배치하면 된다. 그렇게 초안이 만들어지고 지도교수님 두 분이 첨삭을 거쳐 리포트가 완성되었다.


완성된 연간 리포트


리포트에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은 1) 문헌조사, 2) 연구 진행상황 3) 윤리 신청 상황 4) 슈퍼바이저 팀과의 커뮤니케이션 5) 논문의 구조 6) 앞으로의 계획 등이 있다. 간단히 말해, 1년간 문헌조사는 충실히 했는지, 어느 정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만일 프로젝트가 3가지의 연구로 구성되어 있다면 각각에 연구에 대한 연구 윤리 계획서 (Ethical progress)  승인 여부도 기재해야 한다. 미국이나 한국은 연구 윤리 계획서를 IRB (Institutional Review Board)라고 하고 영국은 Ethics라고 한다. 그냥 같은 거.


위와 같은 구성요소들을 포함한 리포트를 완성하고 이 리포트를 기준으로 15분 분량의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발표자료를 준비하면서 리포트에서 언급하지 못했던 점이나 수정해야 할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리포트는 제출을 해버렸고, 슬라이드로 못 다 한 말들을 구겨 넣어야 했다.


주요 페이퍼는 꼭 프린트해서 종이로 읽는다


나 같은 경우는 리포트를 작성할 때도 슬라이드를 만들 때도, 미리 충분한 자료조사를 마치고 시작하는 타입은 아니고, 일단 닥치는 대로 써놓거나 발표자료 또한 긁어모아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관련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타입이다. 일단 눈으로라도 확인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기준으로 공부한다. 그러니까 자료를 찾고 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뭐라도 쓰고 이를 뒷받침해줄 레퍼런스를 찾는 것이다. 물론 지난 1년간 들춰봤던 수십 개의 논문들이 머릿속 어딘가에 희미하게 저장되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 방법이 정답은 아니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방향성이 없는 상태에서 자료를 찾는 일은 목적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리뷰하는 날이 점점 다가왔고, 선수  보다  극심한 긴장감에 시달렸다. 영국과의 시차 때문에 밤낮은 거의 바뀌어 수면 패턴은 엉망이었고 새벽 4시가 돼서야 잠이 들어, 10시를 넘겨 일어나기를 반복.  3주간 주말 없이 지냈다. 딱히 엄청난 작업을  것은 아니지만, 어떤 질문을 받을지 도무지 상상이 안돼서 리포트에 있는 내용들을 토대로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궁금해할  같은 부분들에 대해서 미리 코멘트를 만들어 놓는  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여 잠이   있었다.


핵심 레퍼런스를 수기로 작성하고 질문에 대비한 코멘트를 하이라이트 했다


발표 연습은  2주간 만들어 놓은 발표 스크립트를 외우고 녹음하고, 외우고 녹음하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스크립트를 보고 읽기만 했는데도 30분이 훌쩍 넘어갔다. 그래서 핵심 포인트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연설명들은 발표 후에 질문에 따라 활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16 정도까지 시간을 줄였고, 어차피 실전에서는 긴장해서 말이  빨라질 것이기 때문에  이상 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발표를 연습하고 남는 시간에는 질문에 대처하기 위한 근거들을 찾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썼다.  근거들이 조금 비약적인 증거라 할지라도, 질문에 어떤 식으로든 대답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그렇게 4월 7일, 발표하는 날이 밝았다. 리뷰는 2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처음 15분은 심사위원이 먼저 미팅룸에 접속해서 내 리포트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15분이 지나고 내가 미팅룸에 접속해서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준비해온 슬라이드와 함께 약 15분간 발표를 했다. 그리고 약 1시간 정도 연구주제에 대해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 동안 나의 슈퍼바이저는 참관만 할 수 있고, 나와 심사위원들이 논의를 하는 동안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연구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 슈퍼바이저는 미팅룸에서 나가고 심사위원들과 슈퍼바이저팀에 대한 이야기와 기타 박사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어려움이나 요구사항에 대해서 물었다. 그렇게 15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 슈퍼바이저가 다시 미팅룸에 들어와 서로 코멘트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후에 미팅은 마무리가 되었다.


발표 진행 중


리뷰가 끝나면 심사위원들은 회의를 통해 나의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합격을 제외한 약 3가지의 다른 옵션이 있는데, 1) 영국에서 석사와 박사의 중간단계에 있는 Mater of Philosophy (MPhil) 과정으로 내려가는 것과 2) 학업을 중단하는 것 3) 최대 6개월 후에 다시 심사를 하는 것 등을 권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 대학원으로 부터 이메일이 왔다. 합격여부 및 심사위원들의 코멘트와 함께.


합격!



최종 코멘트


유학을 처음 시작하고 지금까지, 영어에 대한 두려움과 언어장벽 때문에 하도 쭈글이 생활을 하던 터라, 남들에게는 어쩌면 쉬울지도 모르는 일들도 하나하나 도전과제가 되었다. 물론 그것을 해냈을 때 오는 기쁨도 배가 되긴 하지만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이로써 박사 1년 차 연구 리뷰를 마치고 나니, 이토록 많이 긴장하고 유난 법석 떨 일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준비를 잘하면 떨어지기도 쉽지 않고, 준비를 안 하면 붙기도 어려운 딱 그 정도.


그저. 이렇게 한 고비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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