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성 Jul 30. 2021

올림픽은 운동회가 아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

도쿄 올림픽이 한창이다. 효자종목 양궁에서 금메달은 물론 펜싱에서 메달 획득 소식까지. 대한민국 스포츠는 동하계를 막론하고 이미 스포츠 강국 반열에 올라있다. 탁구선수 신유빈 선수의 경기가 화제였으나 아쉽게도 포디움에 오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일전에 선수들의 인터뷰에 관련해서 포스팅한 적이 있다. 은메달을 따고도 국민들께 사과하는 문화, 그리고 포디움의 가장자리에 올라온 선수들의 일그러진 표정은 대한민국은 1등이 아니면 기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저 2등이나 3등의 자리가 그렇게나 불쾌했던 걸까? 사실. 우리나라 엘리트 체육계는 성공한 엘리트 선수의 기준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때부터 학업을 비롯해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일련의 특권을 포기하고 달려든 운동선수의 길은 1등이 아니면.. 은퇴 후에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요즘 선수들의 눈에 띄는 점은 선수들이 참 밝다는 것이다. 인터뷰도 참 잘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스포츠를 즐긴다. 그리고 결과보다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선수들의 변화와 더불어 대한민국이 운동선수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용의 패러다임 또한 바뀌고 있다. 더 이상 운동선수는 배고파서 선택하는 직업이 아닌 모두가 선망하고 우러러보는 인물이 되었고 이제는 운동선수치고 다른 뭔가를 잘한다는 소리가 어색한 사회가 되었다. 운동선수가 말도 잘할 수 있고, 운동선수도 똑똑할 수 있다.


올림픽은 선수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는 자리다



올림픽이란 무대는 모든 선수들의 꿈이며 선수로서의 가치를 증명할  있는 가장 숭고한 자리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그저 선수들이 지역대회에 출전한 마냥 다음에도 기회가 많이 있으니 당장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장려하는 분위기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선진화된 문화처럼 비추는 언론. 경쟁의 유의미한 가치를 전달해야 하는 뉴스 미디어도 정치적 올바름에 갇혀 경쟁과는 무관한 기사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중계진이 선수의 메달이 우리가 원했던 메달아니었다고 말한 것이 구시대적 성적주의를 강요했다는 뉘앙스로 비틀어 버린다. 선수들이 어떤 성과를 낼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중계진의 태도, 언론의 표현에만 지나치게 집착한다. 나는 이대로도 괜찮은지에 대해 묻고 싶어 졌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결과에 대한 승복은 아름답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다. 비록 경쟁에서 패했더라도 선수가 보여준 투지와 끈기에 공감하며 응원하는 우리도 선수들을 통해 용기를 얻는다. 그들의 도전과 승리로부터 나도 삶의 동력을 얻고 싶다. 선수가 정말 진지하게 경쟁했다면 이기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원망스러운 기분과 처절함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마치 요즘 세대 선수들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듯 비추는 언론.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여론. 소셜미디어를 통해 잘 진 것에 대한 의미를 확대 해석한다.


엘리트 스포츠는 복지나 건강증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체육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몇몇 비인기 종목들은 여전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존폐의 위기에 처한다. 종목 수준이 떨어지면 인기 또한 떨어지는 것이다. 인기가 떨어진 종목은 다음세대로의 전환이 어렵다. 아무도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목을 업으로 하는 선수들은 올림픽에 출전해 반짝 관심을 받을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것이다. 찰나의 관심도 여전히 관심이다. 거두절미하고 올림픽 수준의  엘리트 선수는 실력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래도 정말 지는 것이 괜찮은가?


엘리트 스포츠에서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는 바로 경쟁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수가 왜 최고인지 아님 왜 최고가 아닌지에 대한 처절한 분석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치열한 경쟁을 통해 1등이 2등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2등이 3등보다 높은 가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처절함을 깨닫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고에 도전해야 한다.


올림픽은 운동회가 아니다


선수가 언제까지 선수일 수 있을까? 언제까지 국가대표 일 수 있을까? 앞으로의 삶에서 얼마나 더 탁월해질 수 있을까? 운동선수는 숭고한 경쟁의 의미와 탁월함이 주는 보상을 누구나 꿈꿀 수 있다는 점에서 특권을 가졌다. 악바리 근성으로 죽기 아니면 사는 심정으로 대한민국 스포츠를 현재의 위상으로 끌어올려준 과거 세대의 유산을 지켜야 한다. 경쟁에 연연하는 것을 마치 구시대적 가치로 밀어내고 쿨하게 지는 것을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는 여론의 분위기가 선수가 금메달을 따려는 열망까지 약하게 할까 우려된다. 구시대적 스포츠 문화에서 탈피하는 것은 백번 찬성이지만 경쟁력이 약해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는 안일함은 누군가의 간절함에 의해 그 모습을 감출 것이다. 다음이 아니라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이겨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경쟁의 가치는 최고 목표를 세운 선수만이 깨달을 수 있다. 근사한 인터뷰도 기왕이면 이기고 하는 것이 폼난다. 올림픽은 운동회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능보단 노력이 정말 더 중요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