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성 Apr 24. 2022

나의 고백.

결핍과 마주할 용기.

최근 며칠 페이스북에 글을 몇 개 올렸다. 왜인지는 모르나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이나 기분은 브런치보다는 페이스북 피드에 쓰게 된다. 여긴 아무래도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적는다기 보다는 몇 날 며칠 숙고한 주제나 길게는 몇 달 동안 머릿속에 떠다니던 글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페이스북 피드에는 무언가 짧게 써야 한다는 스스로의 제한적인 생각 때문에 매일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오히려 마음껏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곳은 여기인데도 말이다. 왠지 여기 브런치에 글을 쓸 때는 여러모로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나 보다.


글을 쓰는 것도 우리가 살면서 겪는 수많은 일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 완벽한 상태는 실제 행동하는 것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무언가 부족하고 제한이 있는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할때 인간의 행동은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논문형식의 글을 쓰려면 보조 모니터가 필수인데, 그것은 한쪽에는 참고할 수많은 논문들과 검색창을 띄워 놓고 다른 한쪽 모니터로는 나의 글을 써내려 가기 위함이다. 당장 다른 논문을 참고하거나 검색할 일이 없는 경우에도 보조 모니터가 없는 상태에서의 작업은 영 진전이 없고 기분이 나지 않는다.


무릇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만한 좋은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는 강박이 있다). 그래야 효율이 좋다 (고 믿어왔다). 재밌는 건 이제 최소 17인치 정도 이상되는 보조 모니터가 없으면 노트북 하나만으로는 더 이상 공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엔 노트북 하나만 있어도 (다소 효율은 떨어졌다 해도) 멀쩡히 공부할 수 있었음에도 이제는 '모니터가 있는 상태'에 적응했기 때문에 '노트북만 있는 상태'는 문제가 된 것이다.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이유가 자연스레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수만 가지의 문제에 직면하고 그것을 해결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문젯거리일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삶이 대단히 즐겁지는 않더라도 그냥저냥 멀쩡했던 사람들도 '우울증 진단'을 받으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심지어 우울증이란 의학적 정의만 알게 되어도 현재 느끼고 있는 기분과 지난날 느꼈던 슬픈 감정들을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긁어와 '우울증 증상'이라는 박스 속으로 구겨 넣는 것이다. 마치 MBTI 신드롬 같은 것이다.


"내가 우울증이라 그 때 그랬던 거구나.." 같은 거.


물론 심각한 정신질환은 의학적 치료를 요구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슬픈 감정은 대부분 지나간다. 오히려 그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반증하지만 끊임없이 우리는 문제를 만들어내고, 그 문제안에 자신을 가둔다. 마치 문제 속에 살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나는 유학생이니 원어민보다 영어가 부족하니까 두배 세배 열심히 해야 해."
"나는 붙임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소통능력을 키워야 해.." 등등.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결핍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결핍속에 산다. 어쩌면 결핍이 없는 상태가 더 두려울지도 모른다. 결핍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래 왔다. '학창 시절 선수생활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결핍) 나' 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학창 시절 공부를 남들처럼 착실히 했다면 그 결핍이 채워졌을까? 아니. 또 다른 결핍을 만들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연고대를 나온 사람들은 서울대를 가지 못한 것이 결핍이고, 서울대를 간 사람들은 집안에 돈이 부족해 하버드를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늘 최선을 다했음에도,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습관처럼 결핍을 만드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게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는 이상, 우리는 부족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핍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삶의 기준을 남에게 맞춘 사람들이다. 내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평생에 걸쳐 누군가와의 비교 혹은 어떤 절대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노력을 밥먹듯이 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 걱정 없이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진정으로) 사는 친구들이 어떤 면에서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기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그것이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을 때 놀아본 놈들이 결혼하고 정신 차리고 가정에 충실한 경우와 비슷한 맥락이랄까. 진정으로 나를 위해 살아 봐야 남을 위한 삶도 기꺼이 사는 것이다. 평생을 남의 기준에 맞춰 산 사람들이야 말로, 누군가의 사소한 부탁조차 강요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무시한다며 자존심을 세운다. 자신을 향한 모든 조언이나 걱정조차 강요이며 침해이다. 이제껏 남을 위해 희생했는데 자기가 왜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냐며 성질을 부리는 것이다. 한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적이 없기에, 남을 위해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음 달에 코펜하겐에서 마라톤에 도전한다. 대단한 도전이라기 보단 그저 완주가 목적이다. 도전의 이유는 간단했다. "하고 싶으니까". "올해는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생각했으니까." 딱 이 두 가지 이유밖에 없다. 하지만 평생을 결핍에 둘러싸여 살던 나라는 인간이 대회 신청을 하지 않을 이유는 수백 가지가 되었다.


"아직 하프마라톤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 (결핍), 너무 성급한가?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한창 운동할 때도 뛰어보지 못한 거리 (결핍)인데, 괜찮을까?"

"학교 일 때문에 바쁜데 (결핍) 마라톤은 무슨 마라톤이냐. 정신 차려라!"


등등. 회피할 이유는 천지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그 결핍들 (두려움)을 인정하니, 생각이 명료해졌다. 저 결핍들이 실제하는 것도 사실이나, 완주 못하면 뭐 어떠나? 힘들어서 포기하면 어떠나? 바쁘면 하고 싶은거 다 참아야 하는 건가?


반만 뛰어도 이제껏 뛰어보지 못한 거리를 뛰게 된 것이고, 저 수 많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옮긴 나 자신을 격려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괜찮았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으니, 회피할 이유가 없어졌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촘촘하게 쌓여 가득한 나이지만 이렇게 조금씩, 내 안의 결핍을 인정하고,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해보기로했다. 그러다 보면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에 걸쳐 결스스로 결핍을 만들어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어떤 것은 진짜 결핍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애초에 결핍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을 떠나 나라는 인간에게 자유가 여전히 내 삶에 존재한다는 희망을 얻는 것이다.


내 안의 수많은 두려움들을 정면으로 마주 할 용기. 사실 그게 전부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을 기억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