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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성 Dec 21. 2019

인종차별

유학생이 바라본 유럽의 인종차별과 차별적 행동

Image by Javier Robles from Pixabay 


"요즘 같은 시대에 인종차별이 어디 있어?." 지인으로부터 처음 인종차별에 대한 경험을 전해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그동안 적지않게 해외를 나가본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유학을 오기 전에 인식하고 있던 인종차별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흑인들이 받는 차별이나 부당함 정도가 전부였다. 역사적으로 인종차별은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 노예제를 유지함으로써 이로 인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남북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심리적인 근간도 역시 인종 간의 차별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위와 같은 역사는 역사일 뿐,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인종차별이 웬 말인가. 누가 다 해결한 거 아니었나?  


내 대답은 '아니오' 쪽에 가깝다.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항상 부당한 건 아니다' 정도로 얘기하고 싶다. 이 글은 인종차별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함을 미리 밝혀 둔다. 인간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차별'을 하며 살아간다. 익숙하지 않은 것,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내가 익숙한 것, 나와 같은 것 구별하고 또 그것을 통해 안정감을 느낀다. 해외여행 중에 같은 한국사람을 만나면 한국에서 보다 더 반갑고, 사진 없는 식당 메뉴판에서 한글이라도 보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한번 쓴 아이폰을 삼성으로 바꾸지 못하는 이유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 자기 계발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르는 것을 수용하고 탐구하는 것이 옳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심리는 편하고 익숙한 것을 찾는다. 살기 위해서. 


미국의 예로 2009년 하버드 대학의 한 흑인 교수가 자신의 집 문이 안 열려 강제로 열려고 하다가 주민의 신고로 인해 경찰이 강제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사례가 있었는데, 이와 같은 논란은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 이슈로 기억되고 있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경찰이 부당하게 체포를 한 것인가? 아님 교수의 대처는 정당한가? (관련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090723062900009)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 또한 한국인의 유전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미국인, 중국인 등등 다양한 유전자의 합이다. 사람의 유전자는 99.9% 가 동일하고 나머지 0.1%의 차이가 피부, 머리카락, 키 등의 신체적 차이를 만든다고 한다 (관련기사 https://www.mk.co.kr/news/it/view/2019/03/125419/). 과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피부색이나 또는 문화 차이로 인해 다른 인종을 차별하는 것은 스스로 무지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 예능 종편 방송에서 작가 조승연 씨가 방송에 나와 경험담을 이야기 한 바로는, 그가 영국 런던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걸어가고 있는데 한 영국인 노부부가 길을 물었다고 한다. 최소 4개 국어에 능통한 조작가는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영국인 부부에게 길을 친철히 설명해 주었고, 도움을 받은 영국인 할아버지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조 작가에게, "당신은 우리 영국의 동방 식민지인 (Oriental Colonies)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작가는 자신이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고 하니, 그 노부부는 그럼 우리 서부 식민지인 (Western Colonies) 이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여기서 이 노부부는 의도적으로 인종차별을 한 걸까? 아님 그저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세상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것일까? 전자는 문제가 되지만, 무지한 것은 죄가 아닐 것이다. 


어떤 브런치의 작가 글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꽤 충격적인 글을 본 적이 있는데, 프랑스인 남편이 지나가는 다운증후군 장애우를 보고 '몽골'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관련글 https://brunch.co.kr/@namoosanchek/48). 1886년 영국의 랭던 다운이라는 의사가 자신의 이름을 따 '다운증후군'라는 병명을 가진 지능 장애자의 케이스를 세상에 소개했는데, 이 환자들의 얼굴이 넙적하고 콧대가 낫고 눈꼬리가 올라간 몽고계와 유사하다고 하여 명명되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중국을 비롯한 알타이어 언어 계통의 몽고, 한국, 일본, 여진족을 의미한다. 우리 역시 어렸을 때 칭기즈칸의 후손이라 배우지 않았나. 당시 다운 박사는 다운증후군 환자는 우수한 백인종이 열등한 동양 인종으로 퇴보했다는 가설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694274). 백인들은 어쩌면 역사적으로 동양인들을 자신들보다 미개한 존재로 오랫동안 학습했다는 의미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온 사회가 인종차별에 대한 심각성을 교육하고, 더불어 과학이 발전함으로써 인종간 열등함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줄거나 정확한 사실에 기반해서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문화적 차이에 따른 차별적 행위의 원인은 그들이 동양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지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 경험으로 이야기하자면, 여기 유럽권 국가 영국, 독일,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에서 느낀 인종차별적 행동으로는 길을 가다가 중국어를 한다던지 (뉘앙스에 따라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알 수 있다), 가운데 손가락을 추켜올린다던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밤늦게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중학생 정도 되는 무리가 와서 나한테 말을 걸더니 "당장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대부분 한 두 마디 하고 지들끼리 웃으면서 도망가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보통은 그 이상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또 한 예로는 아내랑 함께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전통시장에 먹거리를 구경하러 가서 음식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주인아줌마가 우리 내외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인가 하고 큰소리로 이야기하면서 눈도 마주쳤지만, 우리는 그저 유령일 뿐이었다. 이럴 때 아주 적절한 대처 방식은 무지한 아줌마를 무시하는 방법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리를 지른다던지 손가락 욕을 하는 것은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모든 부당한 차별을 '인종차별'이라고 개념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단순한 차별적 행동과 인종차별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은 혐오의 일종으로 현대사회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사람 간의 취향이나 성격에 따른 차별은 상황에 따라 태도의 문제로 간주 되기도 한다. 나를 갈구는 직장상사가 싫어서 매일 인사도 잘 안 하고 함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내가 정말 차별을 당한 것인지, 왜곡된 이해로 인한 거짓 인종차별을 겪은 것인지 분리해야 한다. 위에 서술한 모든 차별적 경험을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적응하거나 살기 어려울 것이다.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은 때로는 우리가 스스로 정의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과 언론에 의해 개념화되면서 의미가 혼재되기도 한다. 고로 혐오와 같은 마땅한 근거가 없거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차별로 인해 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다면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통의 차별적 대우들은 차별을 하는 사람의 싸가지의 문제이다.  


내 속을 들여다 보아도 나 역시 다른 문화권에 대한 차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제는 잘 쓰려고 하지 않지만 우리가 흔히 무의식적으로 접할 수 있는 '짱개', '쪽발이', '깜둥이'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남산에 우르르 수백 명씩 몰려와서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새치기를 하는 중국인들을 보고 위아 더 월드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인종차별이 아니라 단순히 개인의 차별적 행동이 아닐까? 오히려 서양 사회에서는 인종차별주의적 단어 사용은 오래전부터 터부시 되어왔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잘 교육된 측면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 내가 남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만큼 나 역시 차별을 겪는 것이다. 애초에 나를 남과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남에 의해 구분되는지 조차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고 차별하고 구별한다. 


우리끼리 차별은 또 어떤가? 만약 강남 한복판을 활보하고 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흡연자의 관점으로는 흡연자를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규정지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이나 유럽은 지붕만 뚫려있다면 어딜 가나 흡연구역이다. 심지어 유모차를 끌고 가면서 담배를 피우는 엄마들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마주친다. 그렇다면 이 엄마들은 잘못일까? 아님 문화로서 받아들여야 할까? 최소한 서양사회의 다름은 문화적 차이로서 이해하지만, 때로는 같은 한국인들끼리 더 날카로운 잣대로 서로 차별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회에는 인종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차별이 만연하다.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때론 의식적으로) 남과 비교하며 구별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별이 인간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변인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만약 나의 가족이 사고를 당해 응급한 상황에 있다면, 내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가장 뛰어난 의사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영어를 배운다고 한다면 우리의 영어점수를 최대한 빨리 향상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을 선호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력 없는 의사나 영어 선생님 입장에서는 환자나 개인에 의해 차별을 당한 것인가? 글쎄. 그저 차별적 선호도에 의한 선택의 결과이지 타자에 의해 차별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피부색이나, 문화적 차이의 다름으로 인한 인종차별은 기본적으로 차별을 행하는 사람의 문제이지, 당하는 사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종차별의 원인이 조승연 작가에게 길안내를 받은 영국 노부부의 무지함 때문인지, 아내와 내가 겪은 스페인 전통시장의 아주머니의 성격의 문제인지, 내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친 중학생 아이의 미성숙함에 있는지는 내가 그 차별을 받아들인 정도에 따라 달리 결정된다. 모든 유형의 사회적 차별은 과거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다양한 문화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지식을 길러서 차별의 유형을 걸러 낼 수 있는 멘탈리티를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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