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심시티’라는 게임을 즐겨했다. 도시와 높은 건물을 보며 늘 설렜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세상을 구현하게끔 했던 심시티는 단순한 게임 이상의 도구였다고 할까. 주거 구역을 설정하고, 공업 구역, 상업구역을 적절히 설정하면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이 살고, 서서히 도시가 갖춰진다. 게임 속 주거 수요가 넘치면 빈 땅 이곳저곳에 새로 도시를 지으면 됐고, 건물이 맘에 안 들면 다 철거해버리면 됐다. 게임 속 시민들은 교육문제, 교통문제 등등 갖가지 불평불만을 쏟아내지만 게임이니까, 뭐 무시해도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게임 속 도시가 만들어지는 모습. 도시가 커지면 오른쪽 사진같이 교통문제가 발생하고 이에 불만을 갖는 사람도 생긴다.
정부가 지난 5월 3기 신도시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신도시 급 규모로는 남양주 왕숙(6.6만 호), 하남 교산(3.2만 호), 인천 계양(1.7만 호), 고양 창릉(3.8만 호), 부천 대장(2만 호) 총 5곳이며 (과천 지구는 법적 요건을 봤을 때 신도시가 아닌 대규모 택지지구로 본다), 기타 중·소규모 택지지구 수 십 곳 또한 새롭게 지정했다. 이번 3기 신도시 계획은 수요-공급의 균형 관리를 통해 주택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결정으로, 후속 대책으로 정부는 GTX 조기 착공, 신안산선을 비롯한 수도권 광역철도 건설 등 광역 교통망 확충을 내놓았다. 1)
서울의 집값은 지난 정권들부터 계속되었던 수많은 부동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상승되어왔다. 소득 수준 하위 20% 서민이 서울에서 하위 20% 수준 가격의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평균 21년이 걸리고, 강남의 상위 20% 가격의 집을 사기 위해선 무려 109년이나 걸린다는 분석 결과 2)가 나올 정도로, 서울의 집값이 일반 서민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높은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이처럼 서울의 과열된 집값을 잡기 위해 90년대 1기 신도시 계획(일산, 분당 , 중동, 평촌, 산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서울 주변 수도권에 신도시 개발을 착수해왔다. 서울의 높은 집값을 성공적으로 (잠시나마) 안정화시켰던 1기 신도시의 성공 이후, 정부는 2기 신도시 개발(판교, 동탄, 운정, 한강, 양주, 광교, 위례 등)을 비롯, 수도권 곳곳에 많은 신도시를 짓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2기 신도시 이후 정부는 부동산 정책 기조에 있어 신도시 개발을 지양하고, 도시재생 뉴딜 사업 등에 집중해왔다. 일본의 다마 신도시는 이러한 기조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신도시 얘기만 나오면 거의 빠지지 않는다.) 197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신도시였던 다마 신도시는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여파를 고스란히 맞고 말았다. 신도시에 처음 들어와 살게 됐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이제 노인이 되었고, 도시에는 빈 집이 넘쳐나고 청년들은 도시를 떠나 신도시는 더 이상 신도시가 아닌, 활력을 상실한 낡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3)
이러한 다마 신도시의 현실은 어제오늘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 절대 아니었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던 일본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이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2기 신도시 개발의 실패 이후 국내의 수많은 언론이 앞다투어 일본의 다마 신도시를 조명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가 현실이 되어버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기존의 1·2기 식 신도시 개발은 수많은 한국판 다마 신도시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신규 신도시 개발을 지양하고 도시재생 뉴딜사업 등에 집중하던 정부였지만, 새로운 대책들에도 불구하고 폭등하는 서울의 집값을 잡기 위해 한동안 접어두었던 신도시 카드를 다시 꺼내 들고 말았다.
[사진 출처: 헤럴드경제] 위례신도시 전경
정부는 이번 3기 신도시 계획은 세부적인 교통 대책이 망라되었기 때문에, 지난 2기 신도시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는 듯하다. 하지만 2기 신도시의 실패를 ‘새로 지을 신도시는 더 잘 계획해서 지을 것이니 괜찮을 거야’라는 식의 생각으로, 또는 그저 3기 신도시를 위한 반면교사쯤으로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2기 신도시에 입주했던 많은 사람들은 개발이 시작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미흡하기만 한 교통 환경에 고통받고 있다. 제대로 된 상권과 업무지역이 전무하다시피 해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2기 신도시 특성상, 대부분의 주민이 서울로 출퇴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교통 대책의 부재는 주민들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 실패한 2기 신도시는 당장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이런 현실부터 해결해 나가려는 제대로 된 노력조차 하지 않고, 새로운 신도시를 또 짓겠다는 계획이 과연 올바른 결정인 것일까? 물론 게임 속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였다. 교통이 불편하다, 이런 동네에서 살기 싫다 등의 게임 속 시민들의 주장은 뒤로 한 채, 비어있는 땅에 마구잡이로 집을 지어도 아무 문제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심시티가 아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서울로의 집중화, 도시 슬럼화같은 복잡한 문제가 게임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3기 신도시 발표가 실제로 서울의 집값 안정에 크게 영향을 끼쳤는지도 미지수다. 발표 이후 한달이 지난 현재서울 지역의 집값은 하락세가 둔화되거나, 오히려 강남구와 같이 매매가 변동률이 상승한 곳도 있었다. 반면 1기 신도시 중 한 곳인 일산의 경우엔 발표 이후 하락 폭이 더욱 커지는 모양새다. 서울 집값을 잡기 위해 내놓은 계획이었지만, 아직 서울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기존 수도권 신도시 지역의 집값만 떨어뜨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4)
물론 90년대 1기 신도시 개발 이래로 신도시 개발이 가져온 좋은 현상들을 간과할 수는 없다. 본래 취지에 맞게 당시 수도권 집값 안정과 안정적인 주택 공급에 기여한 바가 컸다는 것은 분명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기 신도시 또한 개발 이후 25년이 넘어가는 지금, 아파트 노후화를 비롯한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고, 재건축 또한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1·2기 신도시보다 훨씬 좋은 지리적 요건을 지닌 3기 신도시의 등장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1·2기 신도시의 쇠락과 공동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3기 신도시 지정 이후 불거진 1·2기 신도시 주민들의 거센 반발과, 앞서 언급한 다마 신도시와 같은 사례를 보며 또다시 등장한 신도시 계획에 대해 우리는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집값을 잡기 위해 다시 더 많은 집을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는 왜 집을 짓고, 왜 집에 사는지 되물어야 한다. 집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집이 필요로 하는 곳에, 집이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개발과 자본의 논리로 산을 깎거나 허허벌판에 집을 짓는 일은 없어야 한다. 20년 전쯤엔 그렇게 해서 집값이 안정화될 수 있었다고 하자. 그러나 고령화, 인구 감소 문제에 당면한 오늘날, 그런 식의 개발이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까? 한 번 지은 도시는 수 십 년간, 혹은 수 백 년 간 그 생명을 지속한다. 당장 앞만 내다본 결정으로 수 백 년 간 아무도 살지 않을 유령도시가 생겨난다면, 미래의 후손들은또 어떤 대책을 내놓고 골머리를 앓아야할까. 이제 우리는당장의 집값 안정을 위한 도시 계획이 아닌, 장기적이고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관점에서 집을, 도시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삶의 질, 교통, 환경, 지속 가능성 등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고려한 새로운 방식의 도시계획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