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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예비군

by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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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구청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산골짜기로 향한다. 버스 안에서 나는 몸을 구겨가며 잠들고 싶었으나 끝내 자는 시늉을 하고 말았다. 장정들을 싣고 나르기엔 비좁은 자리였다. 한 시간 가량을 달린 버스는 서울 외곽에 위치한 훈련소에 도착했다. 봉우리만 넘으면 고향이 코앞인 이곳에서, 나는 군복을 입고 전쟁 연습을 한다. 작은 체구에 거창한 군복을 입은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사격도, 구보도 모두 젬병인 주제 군인 행색을 하는 것이 같잖게 느껴졌다.


각자에겐 맞는 일이 있다고. 적어도 나는 군인이 될 운명은 아니라고. 좁은 길을 걸으며 불현듯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가 운명대로 살 수 있을까. 반세기 전 군복을 입고 나라를 지켜야 했던 이들은 끝내 이데올로기를 지켜야 했다. 그 대가로 애꿎은 양민들이 무참히 죽어야 했다. 그들은 정말 그럴 운명이었을까. 그럼 나는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가. 나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이 군복을 입고서 나는 대체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훈련 간 휴식시간. 잠시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른다. 꽃잎이 흐드러지게 핀 부대 안은 어딘가 모순적인 데가 있었다. 나는 꽃과 순을 바라본다. 낡은 것에서 피어나는 가녀린 것들이 마음을 이끈다. 총탄 소리와 화약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피어난 것들이다. 그렇기에 더욱 귀한 것들이었다. 거친 땅 위에 피어난, 연약하지만 끈질긴 생명들. 그들에겐 분명 그들 스스로 지켜내야 할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느덧 훌쩍 나이를 먹은 나는, 오늘로써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마무리한다. 청춘의 수식어였던 군인 시절을 뒤로하고 아저씨의 세상으로 한 발짝 들어간다. 어떤 의무와 속박에서 벗어나 나는 좀 더 스스로를 지키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지켜야 할지, 어떻게 지켜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내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갈고닦고 나가는

부당한 운명이 주어진다면 끝내 거스르는

총탄 대신 꽃과 순을 남기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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