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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에 핀 꽃

by 김민영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염이 어김없이 나를 괴롭혔다. 감기인지 비염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증상에 시달리느라, 봄내음을 맡는 대신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창밖은 분명 봄이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과, 막 돋아난 초록빛 순. 이것보다 더 봄인 것은 없었다.


엄마는 베란다의 난이 꽃을 피웠다고 일러주었다. 정말 여린 꽃이 피어있었다. 제아무리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봄의 전령사라 뽐내어도, 이 집에서는 베란다의 난이 꽃을 피어야 비로소 봄이 오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밥을 먹다 엄마가 문득 물었다. 나의 시간도 빨리 흘러가냐고. 나는,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루가 다른 하루를 닮아갈 때, 오늘이 어제를 닮아갈 때, 우리의 시간은 비로소 세월이 된다고.


불현듯 엄마가 흘려보낸 시간을 생각해 본다. 묻힌 기억을 추모할 겨를도 없이, 수없이 많은 꽃이 피고 지고 모습을 바라봤을 것이다. 수많은 계절을 보냈을 것이고, 어느새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문득 나도 흘러간 시간이 그리워졌다. 조각난 이미지의 파편들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집 구석구석, 먼지 쌓인 가구와 빛바랜 사진들 속의 기억들을.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러는 동안 시력이 감퇴하는 것을 느낀다. 눈이 침침해지자 다 그만두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처음엔 푸르기만 했던 내 방 구름무늬 벽지는 누렇게 바래만 갔다. 변해가는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언젠가 내게도 봄내음을 가득 들이마실 날이 올 것이다. 들숨으로 한가득,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을 음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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