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할수록 또렷해진다. 잘 보기 위해 때로는 희미해져야 한다. 지난한 일과 속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나는, 잔인한 침묵으로부터 끝내 달아나기로 했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땐 달아나야 했다. 역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내선순환 아닌 외선순환 열차에 몸을 싣는다. 다른 방향으로 향하면 무엇이 나올까.
흐드러진 녹음 아래 때 이른 더위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짧아진 소매, 사람들은 여름 준비에 바쁘고 나는 낯선 동네의 극장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다. 익숙지 않은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었고, 시선이 느껴질 땐 고개를 숙이면 그만이었다. 정면이 아닌 곳에도 세상은 존재했으니까.
광고도 없이 영화는 바로 시작됐다. 애매하게 초점이 나간 채 영화는 주인공들의 대화에 귀 기울인다. 등장인물 중 하나인 동화는 자기 눈이 나쁜 줄도 모르고 안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흐릿한 시야로도 세상을 살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흐릿해도 그는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다. 그렇다면 또렷하게 본다는 건 무엇인가. 잘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의 영화가 이토록 불투명한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으므로, 진실에 다가갈 수도 없음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모두 삐뚤게, 흐릿하게, 각자의 시야로 세상을 정의할 뿐이다.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의 세상과 당신의 세상은 달랐다. 고로 블러 처리된 화면이야말로 세상을 올바르게 묘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세상이 다르다면, 다름으로 인하여 날카로운 말과 시선이 쏟아져야 한다면, 나는 과감히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가겠다. 동화가 그랬듯, 흐릿한 시선으로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세상을 담아낼 것이다. 다정한 것들이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고, 그곳에 초라한 나와 당신들이 살았노라고.
그리고 감사할 것이다.
이 세상 위에 살 수 있음을.
나의 흐릿한 시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