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습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장마가 몰아친다는 소식이 무색하게, 비는 잠깐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마치 열대지방에 내리는 스콜처럼. 비의 계절이라는 말도 이제 옛말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더운 여름이 좋다는 말을 자주 하던 나였다. 모든 게 숨죽이듯 얼어붙는 겨울보다, 뜨겁게 피어나는 여름이 더 좋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덧붙이며. 그러나 원체 열이 많은 체질 탓인지 잠시만 걸어도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에 가장 지쳐가고 있다니. 어거지로 이 계절을 붙잡고 있나 싶다가도 정말 좋은 건 좋은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몇 주 전부터 욱신거리던 사랑니를 끝내 뽑아버렸다. 뜨겁던 청춘의 흔적이 서서히 썩어가고, 텅 비어버린 자리로 통증이 밀려들었다. 아픔을 잊기 위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약을 먹어야 했다. 진통제와 항생제로 구성된 약의 조합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온종일 무기력함에 빠지게 만들었다. 안갯속에 갇힌 듯 멍하니 있었고, 일의 능력도 육체의 컨디션도 눈에 띄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부쩍 실수가 잦아졌다. 아무리 사회초년생이라고 해도, 입사 1년 차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만큼의 돈을 받고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 했으니. 거듭된 실수 속에 요령과 변명만 늘어갔고, 겉만 번지르르한 업무일지용 노션을 중구난방으로 써 내려갔다.
잠시간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멍해진 의식 저 너머로 이윽고 망각해 버린다. 지쳐버린 몸과 마음으로 오래 생각을 붙들 여력이 없었다. 때로 이렇게 최악인 순간이 도움이 될 때가 있나 보다. 적당히 버티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서둘러 컴퓨터를 꺼버렸다. 그리고 습기로 가득 찬 테헤란로를 향해 나섰다.
여름이 좋아진 게 언제부터였더라. 어렸을 땐 분명 내가 태어난 봄이 제일 좋았었는데. 가장 한창인 때에 가까워질수록, 몸과 마음이 뜨거워질수록, 여름이 좋아졌던 것 같다. 이런 나도 점점 식어지겠지. 한창 들뜨던 열기가 서서히 빠지면 조금 더 차분해지겠지. 그때는 어떤 계절을 좋아하려나.
그러나 오늘은 제일 젊은 날.
뜨거운 이 계절을, 가능한 한 끝까지 사랑해 보련다.
습기가 이 몸과 마음을 눅눅하게 만들 때까지.
지쳐, 끝내 늙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