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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을 걸으며

by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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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속, 덥수룩해 견디기 괴롭던 머리를 잘랐다. 짧다면 아직도 한참 짧은 머리지만, 잔털을 걷어내니 시원함을 느낀다. 뉴스에선 올여름은 유난히 더울 것이라고 했다. 기록적인 폭염이 예상된다고 했다. 그러나 매 여름마다 반복되는 ‘기록적인 더위’라는 말이, 이젠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 모두의 탓.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으니 조용히 땀 흘리는 편을 택한다.


요새는 말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경계한다. 나와 당신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다. 때로 나의 말은 오해를 사고, 당신의 말은 날카로울 때가 있으므로. 특히 이렇게 무더운 계절에는 더욱 그랬다. 밥을 나눠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낸 우리는, 천천히 더위를 가로질러 각자의 길로 향한다. 서로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비교적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오래전 늘 함께하던 친구들은, 이젠 겨우 짬을 내어 시간을 맞춰야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예전처럼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고, 안부를 묻고, 욕을 하고, 술잔도 기울였지만, 그때의 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알량한 가십거리를 떠들며 사소한 것에 웃던 우리는, 이젠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저마다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저 친구에게도 저런 꿈이 있었던가, 저런 모습도 있었던가 새삼 놀라다가도 문득 내가 하는 일이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늦은 밤까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 뒤, 다음을 기약하며 각자의 길을 향해 걸어간다.


여름이 짙게 깔린 서울의 밤거리를 홀로 천천히 걷는다. 약간의 취기와 습기에 눅눅해진 채. 가로등 불이 훤한 천변을 따라 걸으며 잠시간 생각한다. 나의 길은 어디인가. 누구도 내 길을 대신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속 걸어야 했다. 잘 가다가도 한 번쯤 잠시 멈춰 숨을 골라야 했고, 누군가 우연히 나를 엿보아도 신경 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고,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잘 마무리하는 법도 알아야 했고,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척도 해봐야 했다.


무탈한 척, 무난한 척, 성숙한 척도 했지만 어설픈 실수도 거듭했다. 다 통달한 척도 해봤지만, 결국 충동에 못 이겨 후회할 짓을 하기도 했다. 노래에 맞춰 춤을 춰보기도 했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잠 못 들기도 했고, 까닭 모를, 알맹이 없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써보기도 했다.


다들 잘 헤쳐나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하다가도, 그러나 이렇게 걷다 보면 나의 길도 꽤나 근사한 구석이 있겠지 싶었다. 이따금씩 비추는 야경의 잔상들처럼, 걷다 보면 빛나는 순간이 오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더울 것이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더울 것이다. 일기예보가 그랬고,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더위에 지쳐 녹초가 되든, 습기에 눌려 삭아버리든. 그래도 결국, 우리는 걸어가야 하니까. 문득 강바람이 짧아진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식어가는 땀방울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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