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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는 사람

by 김민영


비가 온다고 하여 꼭 우산을 써야 하는 건 아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세상엔 이유 없는 일도 많고, 당신들도 모든 일의 까닭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때 아닌 더위가 계속되던 날. 연봉협상 기간이라고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회의실로 불려 간 뒤 나의 연봉 이야기를 들었다. 협상이 아닌 통보였다. 고귀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노동이 이렇게 몇 개의 숫자 따위로 평가된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이 돈 몇 푼을 벌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전철 속에서 질식해야 했고,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고민도 해야 했고, 새로운 것도 배워야 했다. 그리고 요즘 들어선 목에 염증까지 생겨가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기도 해야 했다.


최근엔 AI가 내 일자리를 뺏어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다. 그것이 아직 나를 못 견디게 만들지는 않지만, 가끔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허무한 마음이 밀려온다. 그럴 때면 모두 나의 잘못은 아니며 분명 그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나 말고도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 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별안간 위로가 되기도 했다. 위로를 받는 것이 맞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전 경기도 교외 지역의 한 주차장에선 일가족이 차 안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다고 했다. 유서에는 생활고를 비관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같은 마음이었을까. 생이 생을 거둘 수 있는 권리라는 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그러나 이내 묻는 것을 멈추기로 한다. 그들에겐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이야기와 일말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므로.


이유 없는 죽음, 아니 실은 이유가 있지만 아무도 모를. 그리고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쨍쨍하던 하늘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 올바른 사람, 모범적인 사람에 대하여, 고성과자와 저성과자에 대하여, 남자다운 사람과 여자다운 사람, 발전, 정돈되고 완벽한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잘 사는 것에 대하여, 이상적인 사랑에 대하여, 완벽한 삶에 대하여.


일평생을 그런 것을 좇으며 살아왔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었으니. 그러나 그런 것들 너머에는 늘 무너져 가는 것들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떠올려본다. 다시는 없을 천재일우의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겠다며, 정부는 상계동 인근의 판자촌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의하는 아름다운 서울 속에는 가난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 만으로 그들은 쫓겨나야 했다.


치열한 입시를 뚫고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입학하여, 강남 모처에서 직장을 잡고 일하는 동안, 나는 가끔씩 어떤 사회적 기준을 충족한 것만 같아 우쭐해지곤 했다. 그러나 다른 기준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언제든 배척당할 수 있었다. 사랑의 형태, 출신, 인종, 가치관,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하여금. 그렇다면 나는 겨우 운이 좋았던 것이다. 세상이 또 다른 기준과 잣대를 들이민다면, 나는 언젠가 배척당하고 말 것이다.


퇴근 후 사무실을 나서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우산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멍하니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비를 맞아보기로 한다. 하나 둘, 빗방울이 내 몸 위로 떨어지자 차츰 옷이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비를 맞으며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모두 우산을 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 속으로. 그리고 그들 속에서 기이한 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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