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열차는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열차가 힘을 끌어모아 영차, 영차하며 나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을 지나, 남쪽으로 향할수록 높다란 빌딩과 아파트가 점점 자취를 감췄다. 곧 여름을 닮아 푸르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느릿느릿 달리는 이 기차는 이 들판 위를 얼마나 많이 달려갔을까. 이 들판은 이 기차를 얼마나 많이 지켜봤을까. 그리고, 때론 애타게 기다렸을까.
전날 과음한 탓인지, 에어컨 바람을 많이 쐰 탓인지, 목 끝이 부어오른 것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기도 쉽지 않았다. 소맥을 먹었다가, 위스키에 콜라도 타 먹었던 전날 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사 온 커피가 아니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난밤 술자리에서 괜한 말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했다', 도 아니고 '했던 것 같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순전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탓하기 쉬운 변명은 없었으므로. 왜 이렇게 술만 마시면 누굴 웃기고 싶은 건지. 그런데 문제는 늘 내뱉고서 후회한다는 거였다. 괜히 오바한 것 같을 때엔 주둥이를 꼬매버리고 싶다가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보았다.
젊은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 조금은 날것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도 당신도, 사랑에 약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후회할 짓도 많이 했지. 그런데 그게 나인 것을 어쩌나.
터널로, 다리 위로, 논밭 옆으로, 이곳저곳을 굽이굽이 다니는 동안 열차는 시종일관 굉음을 내고 있었다. 나처럼 전날 과음을 한 건지. 아직 술에서 덜 깬 건가 싶었다.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새삼 낡아빠진 무궁화호에 마음이 쓰인다.
젊은 날이 머지않았다는 조바심이 불현듯 들 때가 있다. 어제가 그랬고, 그제도 그랬던 것 같다. 이대로 살다 간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내 집 마련은 애진작에 포기했고, 하던 일마저 인공지능이 가로채갈까 두려웠다. 알량한 꿈은 일상에 묶여 평생 갚지도 못할 빚이 될 것만 같았다. 테헤란로의 횡단보도 앞에서 가끔씩 그렇게 울고 싶었다.
이 기차도 그랬겠지. 자기보다 더 빠른 놈들이 하나 둘 나오고 서서히 잊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렇게 사람들을 싣고 날랐는데도 대접받지 못하는 서러움. 그런 것들을 마음 한편에 담고서 소리 지르고 싶었겠지.
그러나 기차는 달리면 그만이고, 할 일도 하면 그만이고, 사랑도 하면 그만이고, 오늘도 살면 그만이고. 내 인생도 굽이굽이, 터널도 지났다가 푸른 들판도 달려봤다가, 잠시 쉬어도 가겠지.
열차가 노을의 고장에 다다르자, 하구 옆 나무들이 저 멀리서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왔지만 기다려주어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