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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위의 주말

by 김민영


직장인이지만 월급날 직전이 되면 궁핍한 건 여전하였다.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날은 과연 오게 될까. 잔고를 보며 마음이 심란해질 때마다 나는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먹고 입고 쓰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서.

긴 연휴가 찾아왔지만 집에 내려가 쉬는 편을 택한다. 자취생에게 최고의 도피처는 집이었으므로. 따스한 집밥과 주인 잃은 침대가 나를 기다리는 곳. 벌렁 누워 방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지난 날들이 나를 다정하게 감싸 안아주기 시작한다.

가만히 누워 쉬는 것도 잠시 뿐. 인스타그램 속 다채로운 세상을 보노라면 어떤 불안감 같은 것이 엄습해 온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의 하루가 하찮아지는 것만 같아서. 그러나 너무도 고대했던 침대에서의 순간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누워있다, 잠들었다를 반복한다. 이게 다 고단한 한주로부터 온 기력을 다 뺏긴 탓이다. 나에게는 그럴 의지도, 체력도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영화관으로 향했다. 최근 재개봉한 아주 오래 전의 영화였다. 특별한 줄거리는 없었다. 어떤 가수의 콘서트 실황을 다룬 영상 속에선 열정적인 무대만이 계속되었다. 그저 신나기만 하던 노래 가사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대한 - 엄밀히 말하자면 - 체제에 대한 냉소와 비판으로 가득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며칠 전 만난 친구는 새벽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스스로 불사른 것이 이미 수십 년 전의 사건이었음에도. 애석하게도 세상은 그때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 일하던 21세기의 노동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각지에서 목숨을 잃고 있었다. 무도한 기계가, 철골이, 사람들을 무섭게 삼키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언제적 신자유주의가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듣도보도 못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양질의 물건을 값싸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체제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고, 드론이 건물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거실 바닥에 누워 멍하니 지켜볼 수도 있었다.

그간 옳다고 배운 것을 따라 살아왔다. 그렇게 나는 체제의 충실한 일꾼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시력과 건강을 잃어가면서도 여전히 돈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기력하고 무비판적으로 세상을 목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때로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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