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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산다는 것

by 김민영


내일을 산다고 가정하는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빨래를 하고 개는 것, 청소를 하는 것, 샤워를 하고 운동을 하는 것. 이 모든 일들이 내일을 준비하는 몸짓이었다.


만으로 스물여덟. 한국나이로는 스물아홉. 아홉수를 맞아 나는 자주 아팠다. 걸핏하면 부어오르는 목 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몇 알의 스트렙실이 필요했다. 그러나 약을 먹는다는 행위조차 건강한 내일을 염원하는 일이었으므로. 고로 알약은 나의 희망이었다.


짧은 여름 휴가를 다녀온 후, 오랜만에 돌아온 일상에서 나는 실수를 거듭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 하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 끝내 사무실을 뛰쳐나온다.


늘 죽지 못해 산다던 친구는 늘 내일을 위한 준비를 했다. 출근할 때 입을 옷을 골랐고 다음날 먹을 음식 따위를 골랐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대한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늘 고달픈 하루를 반복하면서 대체 왜 내일을 준비하는걸까.


그러면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내일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내일을 준비하는가. 이토록 고단한 하루가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술에 취한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온다. 조심히 집에 들어가시라고 다그치듯 대답하지만, 그토록 취해야 할 정도로 고단했을 그의 하루를 떠올려본다.


마음이 지쳐 몸까지 아픈 사람, 하루살이처럼 견뎌내는 사람, 술에 기대어 하루를 버티는 사람. 이들에게는 내일이 없는 것인가. 결국 내일로 흘러갈 오늘이라는 강물 위에서 당신들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가.


말문이 막히자 얼마 전 다녀온 이국의 도시가 떠오른다. 한때 환상이 현실이 되던 곳. 그러나 서서히 환상이 죽어가던 곳. 우뚝 선 마천루들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도시는 더 이상 내일을 논하지 않는다. 불야성 같던 야경은 끝끝내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희미한 불빛들을 보며 슬펐다. 형용할 수 없이.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어려운 질문의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어떤 희망과 가능성이 아직 이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었으므로.


그리하여 나는 오늘

작은 당부의 말을 남긴다.


죽지 말아라, 세상의 모든 꿈들이여.

희망이 없다면 모두 송장과 다름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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