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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Jul 15. 2022

손자 폰 찾으러 교실 간 할머니
무단 침입으로 고발?

신문 기사들

자료 출처: 구글 검색 화면 캡처


사건의 재구성


1. 2022년에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일이다.

2. A(초등학생)가 학교에서 휴대폰을 분실하였다고 할머니 B(65세)에게 말했다.

3. 학부모 B는 학생 A와 함께 학교로 간다.

4. 학부모 B는 학생 A와 함께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책상과 개인 사물함에서 휴대폰을 찾는다.

5. 휴대폰을 찾지 못한 학부모 B는 담임교사 C에게 분실 사실을 알리고 해결책을 요청한다.

6. (학부모 B의 진술에 따르면) 담임교사는 '경찰에 신고하라"라고 말한다.

7. 학부모 B는 다음 날 학교에 다시 찾아가서 교사의 대응 방식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의한다.

8. 손자 A의 휴대전화는 분실 다음 날 교실 밖에 있던 다른 아이 D의 신발주머니 안에서 발견된다.

9. 교사 C는 "공개된 장소에서 B 씨로부터 삿대질과 함께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고", "교권 침해를 당했다"며 교권보호위원회 개최를 요구한다.

10. 교권보호위원회에서는 학부모 B 씨에게 '사과 권고'를 결정한다.

11. 학부모 B 씨의 교실 무단 침입 사실이 드러나고 교사 C 씨가 무단 침입으로 경찰에 형사 고발한다.

12. 신문 기사가 나간다. "손자 폰 찾으러 교실 간 할머니…‘무단침입’ 고발한 교사"

13. 학부모 B 씨는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처리를 바라고 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모든 사항을 법에 의존하는 것 같아서 실망스럽다. 학생과 학부모의 인권도 생각해 대화로 풀어나가길 바란다”라고 한다.

14. 교사 C 씨는 “교권보호위에서 교권 침해로 나와 ‘사과’ 권고가 내려졌으나 학부모가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이 과정에서 학부모의 교실 무단침입이 드러나 형사 고발하게 됐다”라고 반박한다.


댓글들


C신문사의 K기자가 작성한 2022년 7월 14일 기사에 대한 댓글 중에서 글쓴이가 인용의 필요에 따라서 임의대로 수정 없이 추출하였다.


이 쪽


1. 이게 교육계의 현실이다. 나이 든 분에게서 언쟁 중 욕설을 들었다고 형사 고발을 해. 그 선생이란 자의 인성이 대충 보인다. 게다가 면피용 동정심 받으려고 심리 치료를 받는다? 참 요지경 세상을 살아야 하나? 언쟁이란 테니스 볼처럼 치다 보면 점점 도 격해지게 되어 있는데 교육계에 있다는 자가 먼저 한 발 물러서는 것이 순리 아닌가.


2. 노인을 존경할 줄 모르는 인성이 실종된 쓸모없는 인간이다. 선생에서 몰아내라. 애들이 무엇을 배우겠나?


3. 자초지종을 모르지만 적어도 훌륭한 교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교사는 담임으로서 해당 학생에 대한 배려를 먼저 해야 한다. C씨를 고발한 이유가 결국 기분 나쁘다는 것 아닌가? 생각이 짧고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해 보인다.


4. 나는 할머니 손을 들어주고 싶다.


5. 이런게 교권이라면 짓밟고 싶다~~ 교권으로 갑질하는 이런 인간 땜에 참교사들의 교권이 무색해지는게 아닌가 싶네요...


6. 무단침입? 형사고발? 저런 게 선생이라고? 어떻게 배워 처먹었기에 저런 게 선생질을 하고 있단 말인가?


7. 담임 미친거 아니냐? ㅎㅎㅎ 참나


8. 그렇다고 선생이 무슨 학부형을 고소까지 하고 그러냐? 잘 얘기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참....


9. 해당교사가 심리치료를 받아. 뭐 정신병자냐? 저런 것도 선생질 허나...참...


저 쪽


1. 교사의 입장이 이해가 가는 면은 있는데 좀 답답한 사람이네. 그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다른 학생들의 사물함등을 뒤졌을때 분명히 다른 학생들의 부모들로부터의 항의와 책임추궁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이런 경우엔 경찰에 신고하라고 매뉴얼이 되어있나보네. 그러면 어느 정도 설득력있게 할머니를 설득했다면 문제가 커지지 않았을텐데 그냥 아무 설명없이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나보네. 에휴~교사들 정말 답답한 스타일들 많음.


2. 교사는 메뉴얼대로함이 백 번 옳다. 잃어버린 손자의 폰을 찾는다고 빈 교실에 들어가서 사물함까지 뒤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담임에게 응당 절차를 통해 사실을 알리는 게 순서였다. 65세라면 그 정도 알만한 할매가 정신줄을 놓았는가? 교사에게 사과부터 해라.


3. 할머니가 뭔가 심하게 한 게 있을 겁니다. .... 요즘처럼 교사들이 학부모 눈치 보는 세상에서 교사가 저 정도 반응을 보일 정도면... 할머니가 지나치게 한 게 있을 겁니다.


4. 학부모 말만 듣지 말고 교사 말도 들어봐야 한다. 양쪽 말 다 들어봐야한다. 은근히 진상 학부모도 많다.


5. 많은 사람들이 그까짓일로 교사가 경찰에 신고를 하라한교사를 나쁘게 보는견해가 많은데, 예전 같으면 그렇게 하지않았을것이다. 요즘의 학교현장이나 교사와 학생간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전교조교육감과 학생인권과 체벌 처벌금지 이러한것들이 인간적인면(?)은 아예없다고 보아야한다. 아이 휴대폰 찾는다고 학생들 가방을 조사(뒤??다면) 아주 더 큰일을 교사는 당하게 되어있다. 개인 사생활보호, 인격모독, 등등으로 아~~~ 슬프다 왜?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러니 제대로 교육이란것은 있을수가 없는 현실이고, 단순지식전달자로만 변해버린 학교현실이로구나!!!!


6. 사회가 복잡해지니 자꾸 법 찾게 되고, 그런데 교사가 이 경우에 학교내 일을 법에 의존하고 싶었으면 학부모가 아니고 학교 측이 경찰에 신고하도록 했어야 맞다고 본다. 그러면 사과는 누가해야 될까?


나는 어느 쪽


해당 신문 기사를 읽고는 화가 났다. 일단 화가 났다는 것은 어느 한쪽에 감정이 이입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평소에 모든 상황에 회색 주의자이고 기회주의자인 내가 이 번에는 어느 쪽에 서 있는지 명확하게 표가 났다. 


서른을 넘긴 아들이 박사과정을 마무리하고 있으니, 전혀 개입할 여지는 없지만, 20년 이상 아직까지 학생의 부모, 즉, 학부모인 셈이다. 아이들이 초중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와 담임교사에게 감사 편지도 보냈고, 동시에 항의 편지도 보냈다.


가방끈이 길면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고 여러 나라를 돌며 가방끈 늘이기에 애를 쓴 결과로 교육기관에 재학한 기간이 자그마치 21년이나 되었다. 물론, 20년 이상의 고된 수련과 돈을 날린 뒤에 깨달은 것이 겨우 '가방끈이 길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는 것이 함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여러 나라의 학교 환경과 교육 시스템을 좌충우돌하며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장점도 있다.


가방끈이 길어지면 가방끈의 길이를 인정해 주는 집단에서 일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래서, 몇 개의 나라에서 중등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쳤다. 교직 경력이 15년 정도 된다.


신문 기사를 읽고는, 20년 이상의 학부모, 20년 이상의 학생, 15년 이상의 교사 경험으로 이 쪽과 저 쪽에 모두에 공감을 할 수가 있지만, 보도 기사들이 은근히 학부모의 편을 들도록 유도하는 것 같아서 부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감추어진 1인치를 찾아서 학교와 교사의 입장에 서있기로 했다. 따라서, 학교와 교사의 입장에 편향된 글이 될 것임을 밝힌다.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


보도 기사를 보면 '(동료 교사와 학생들이 지켜보는) 공개된 장소에서 삿대질과 함께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고', 교권보호위원회 조사에서 학부모에게 '사과 권고'를 결정하였다. 드라마의 한 장면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학교에 누군가가 와서 고함을 지르고 행패를 부려도 막을 방법이 없고, 막을 사람이 없다. 학교와 관련이 없는 외부자의 경우에는 경찰에 연락을 하여 도움을 청할 수가 있겠지만, 학부모라면 곤란하다. 기물을 파손하거나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정도가 아니면 경찰에 연락하기가 어렵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학교이니라


내가 경험한 학교의 처리 방식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학부모를 달래는 것이었다. 학부모는 화가 풀릴 때까지 삿대질을 하고 욕을 했다. 조용한 학교에서 일어나는 흔치 않은 소란이라 아이들이 모두 나와서 창문 너머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관련 교사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소란에 관여된 이유 하나로 부끄러워서 학교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어렵다. 학교는 싸움과 분쟁을 극도로 싫어하고 금기시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싸움과 분쟁에 아주 취약하다. 특히, 학부모가 학교로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엄청나게 두려워한다. 그래서, 학교의 약점을 알고 있는 일부 학부모들은  "이것들이, 내일 가서 확 엎어버려야 되겠네."라며 큰소리를 친다. 법적으로 받을 두려워할 만한 조치도 없을 것이고, 보안 요원 하나도 없어서 물리적으로 받을 저항도 없는 만만한 공간이다. 학교는.


보도 기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모든 사항을 법에 의존하는 것 같아서 실망스럽다. 학생과 학부모의 인권도 생각해 대화로 풀어나가길 바란다." 학부모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서 짐작해 보면, 빈 교실에 들어가서 다른 학생을 사물을 뒤진 것에 대해 '무단침입'으로 형사 고발된 것에 대한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고 느꼈다. 감정싸움으로 번진 상태라 담임교사와 합의하기는 싫고, 손자의 휴대폰을 찾으러 간 할머니를 고발한 '몹쓸 교사'로 여론을 형성하여 압박을 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사화되고 시끄러워지면, 학교가 나서고, 교육청이 나서서 무마시키려고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같은 제목의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 않나 짐작한다.


선동적인 기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


한국의 언론 신뢰도가 세계적인 기준에서도 바닥에 있기는 한데, 대중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서 제목 장사를 하거나 자극적이거나 선동적인 기사를 쓰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무도 읽지 못하게 감추어 두는 일기장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목적으로 쓰는 글은 누구나 주목을 받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어 있다. 허망한 선동적인 글쓰기에 몰입을 하고 있었던 나도 어떻게 하면 교묘하게 자극하고 선동할 수 있을까를 교활하게 고민을 한 적도 많다. 그래서, 잘 훈련된 기자들이 작성한 훌륭하게 교묘한 글을 통해서 많이 배운다.


1.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인 사실을 표 나지 않게 잘 섞어라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제일 잘 구사하는 기법이다. 이간질을 당하는 사람들이 "이 말은 저 친구에게만 말한 내용인데"라고 여길만한 분명한 사실에, 듣는 사람이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거짓말을 첨부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 친구만 아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 친구가 한 말임에 틀림없고, 믿기지는 않지만 그런 말까지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런 말을 전달해서 남을 이간질하는 이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자신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하고 다녔다는 사실에 치를 떨게 된다.


당신은 쉬운 상대다.


기사에서는 고매한 기자 윤리에 따라서 거짓말을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상반된 주장이 있는 사실들을 아주 객관적인 것처럼 자기 의도대로 가려 뽑아서 나열하는 것이다. 기자나 기사가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진실을 보도하고 기록하기 위해서는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주장을 펼쳐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 같이 양측의 주장을 전달하면서 주관적으로 사실을 선택하고 한쪽 편을 드는 것이다. '나는 모든 자료를 객관적으로 제공하고 있으니, 판단은 독자가 하시라'며 객관적인 자료를 주관적으로 편집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주관적인 편집에 휩쓸린 독자가 기사의 의도대로 판단하기를 기대하면서. 기사의 진위를 판별할 관련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사가 가리키는 대로 분노하고 손가락질한다. 


당신은 쉬운 상대다.


2.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면서 정서를 자극하는 어휘를 선택하라


관련 기사에서 가장 공을 들인 어휘 선택은 '손자'와 '할머니'다. '손자'는 좀 더 친근한 어휘인 '손주'로 치환되어 쓴 기사도 있다. '손주'는 나이 드신 우리 시골 할머니께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나를 지칭할 때 불렀던 사랑이 듬뿍 들어있는 말이다. "우리 손주아입미꺼." 나는 할머니께서 사 주신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부끄러운 듯이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약 내가 동네에서 놀다가 얻어 맞고 왔다면, 이유도 묻지 않고, 할머니는 득달같이 달려가서 "우리 손주를 누가 때렸노!!"하면서 동네가 시끄럽도록 고함을 지를 분이었다. 손주를 위해서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자기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설 분이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든든했다. 나의 잘잘못을 따져서 반응하는 부모님과는 달리 무조건 내편을 들어주는 할머니가 좋았다. 그래서, 응석을 더 부렸고, 방학 때 할머니 댁에 다녀오면 버릇이 나빠졌다고 부모님의 면박을 듣곤 했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셨고,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집안의 경제를 일으키고,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아들(나의 아버지)을 대학교육까지 시킨 억척같은 분이셨다.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다. 지금은 내가 손자 손녀를 두는 나이가 되었지만,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나의 말이라면 무슨 일이든 들어주고,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분이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세상에 지켜야 할 절차 그런 것 챙기지 않고, 소매자락을 걷어붙이고 달려갈 분이었다.


할머니가 씩씩거리며 달려가서 고함을 지르면, 사람들은 달려 나올 것이다. 그리고, 다들 이해한다는 듯이 "할머니 왜 이러십니까?"라며 달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할머니는 옛날 분이어서 새로운 세상의 절차 그런 것을 모르시기 때문이다. 살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몸으로 부딪히고 깨어지며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무리가 있어도, 시끄럽게 해도, '할머니가 몰라서 그렇다'라고 사회가 이해해 주고 공동체가 보듬어 주었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본식 국민학교 교육을 받다가, 해방이 되어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가, 한국전쟁으로 죽기 살기로 생존하면서 규칙도 없고 질서도 찾기 힘든 고난의 역사를 견디며 살아온 할머니들이 대부분 그러셨으니까.


그래서, '할머니와 손자'라는 말에 감정을 이입하는 순간 우리는 쉬운 상대다.


그 할머니


'손자 휴대폰 찾으러 빈 교실 갔다가 무단침입 고발당한 할머니'라는 신문 기사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났다. 말년에는 허리가 굽어서 바짝 야윈 팔다리를 붙이고 힘들게 걸으셨다. 허리가 굽고 야윈 우리 할머니가 내가 휴대폰을 잊어버렸다는 말에 접힌 허리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학교에 갔다. 손주의 휴대폰을 찾아보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빈 교실에 들어갔다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무단침입으로 몰려서 고발을 당하시는 상상을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도 나고, 생전에 제대로 챙겨 드리지도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를 무단침입으로 고발을 해? 화가 치밀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하는지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다른 관심 있는 기사를 챙기느라 해당 기사의 본문은 읽지 않았다.


오늘 '손주 교실 간 할머니를 무단침입 신고…'몹쓸 담임'의 반전 사연'이라는 기사를 우연히 다시 접하게 되었다. '몹쓸 담임의 반전 사연'이라는 자극을 받고 해당 기사를 클릭하지 않는다면 병원에 가서 감성지수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기자님이 성공하셨다. 제목으로 나를 낚았다.


1957년생이면


드디어 기사의 본문을 읽었다. '학생의 할머니'가 65세였다. 인구 66만 이상이 거주하는 큰 도시의 초등학교였다. 어라, 내가 상상했던 시골의 우리 할머니가 아니었다. 65세면 내가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재학 중 군 복무 후에 복학한 선배 '형'의 나이와 같았다. 몰려다니며 철없는 짓을 많이 하기도 하였고, 지금도 듬성듬성 흰머리가 섞인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옛날이야기를 깔깔거리며 추억하는 '우리 형'과 같았다. "손녀 손자가 있으니 이제 할아버지가 아니냐?"는 놀림에 손사래를 치는 아직도 청년 같고 분별 있고 멋있는 형이다.


할머니도 아니잖아


에이, 그럼 할머니도 아니잖아. 손자의 생물학적 할머니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옛날 시골 그 연로하신 할머니 말이다. 혹독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면서 제대로 교육을 받을 기회도 얻지 못했고, 그렇지만 억척같이 살아 내며 자나 깨나 자식들을 걱정하는 등이 굽은 눈물 나는 우리 할머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저질러도 '잘 몰라서 그렇다'라고 모든 것이 용서되는 그 할머니 말이다.


정신을 잃고 기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열되는 '할머니'라는 단어에 꽂히면, 아마 1957-58년생쯤 되는 학부형을 위해서 '노인을 존경할 줄 모르는 인성이 실종된' 교사라고 비난하고, "나이 든 분에게서 언쟁 중에 욕설을 들었다고 형사 고발을 해"라며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논점은 흐릿해지고 기사가 가리키는 대로 쳐다보게 된다. 1957년생인 선배 형에게 '노인'이라고 호칭하고, '나이가 들었다'라며 어떤 혜택에서 제외시킨다면 화를 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기사에서는 1957-58년생 학부모가 '노인'으로 읽히는 것이 유리하고 유용하다.


우리 형


선배 형이 손자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학교로 달려가서,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가서, 손자 휴대폰을 찾는다고 다른 학생들의 책상과 사물함을 뒤졌다고 한다면, 나는 "형, 갑자기 노망이 들었습니까?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럽니까?"라며 만나는 시간 내내 장난스럽게 비꼬고 비난을 할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어이가 없고 비상식적인 행동이니까. 그러면, 형은 "손자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징징 그려서 그때 정신이 살짝 나갔었나 봐."라며 겸연쩍어하며 썩소를 지을 것이다. 물론, 우리 형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우리 학교의 문제


유럽의 여러 나라를 경험해 보면, 우리나라의 학교 시설이 외부인의 침입에 대해서 아주 취약하다는 점이다. 학부모가 아니고 나쁜 목적을 가진 외부인이었다고 하면, 학교에 들어가고, 해당 교실에 침입을 하여, 개인 사물함을 뒤져서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 어떠한 어려움도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교는 외부의 침입과 폭력에 아주 취약하다. 열려 있는 출입문으로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외국에서 일어 난 학교 내 총기 사고가 없는 안전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흉기를 들고 학교에 난입을 할 경우가 발생하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럽의 초등학교 경험


학부모로서 경험한 유럽의 초등학교는, 아침 등교가 끝나고 일과가 시작되면 학교 부지 내로 출입하는 출입문(교문에 해당)이 닫히기 때문에, 안에서 나올 수는 있어도 외부에서 허락 없이 들어갈 수가 없다. 학교 부지 내로 들어와도, 교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올 수가 없다. 들어오려면, 중앙 출입문에서 인터폰으로 방문 목적을 알리고 문을 열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건물에 들어가도 교실로 바로 갈 수가 없고, 입구에 지정된 장소에서 담임교사나 담당 교사가 와서 안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담임교사의 안내에 따라 학급의 교실에 들어갈 수가 있다. 교실에 들어가서도, 담임교사의 허락이 없이 교실 내의 비품을 열어보거나 다른 학생의 사물함에 손을 대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이 정도로 보안에 철저하고 엄격하다. 어린 학생들을 외부의 잠재적인 위험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우리나라에서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지키고 있는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절차와 과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같은 상황이 발생하였다면


유럽의 초등학교에서, 학부모가, 부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든 상관없이, 학교와 교사의 사전 동의 없이 학교 건물로 들어오고, 아무도 없는 교실로 가서, 교실 안에 있는 학생들의 사물함을 뒤져 보았다면, 학교가 발칵 뒤집어질 역대급 사건으로 동네가 시끄러울 것이다. 해당 사실은 학교에서 상급 기관에 반드시 보고되어야 하고, 해당 학부모는 경찰에 고발되어 조사를 받고 적절한 법적 조치를 받게 될 것이다. 모든 조사 과정이 끝나면, 학교장은 가정통신문을 발행하여 학부모에게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향후에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학교의 보안 시스템을 강화하였으며, 앞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자녀들이 학교에서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는 내용도 덧붙일 것이다.


회사의 보안만큼 아이들의 안전도 중요하지 않나요


각 국가마다 문화가 다르고 사회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특정 국가의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도 무조건 좋을 것이라고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교는 일과 중에 외부인의 출입이 너무 자유스럽고 보안 시스템이 너무 허술하다. 요즘 한국의 회사나 기관에서는 사원증이나 인증키가 없으면 출입을 할 수 없으면서, 학교는 왜 아무나 들락거려도 되는지 묻고 싶다. 회사의 보안만큼이나 아이들의 안전은 중요하지 않은지 질문하고 싶다.


사례 1


오래전에 시도교육청의 장학직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방문한 그날 아침에 유달리 바빠서 양해를 구했다. 나중에 미안해하면서 예상치 않게 분주했던 이유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관내 초등학교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교사들이 출근하기 이전에 일찍 학교에 와 있던 학생이 있었는데, 외부인이 들어와서 어린 학생을 학교 옥상으로 데리고 가서 성추행을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했다.


외부인은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했다. 학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을 잠갔고,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이 출근하는 시간인 몇 시 몇 분 이전에는 가능한 학교에 등교하지 않도록 안내하였다. 수업 전 아침 시간과 방과 후에 학교에 산재해 있는 출입문을 어떻게 개방할 것인가에 대해서 별도의 방법을 찾아보도록 조치하였다.


사례 2


"선생님, 교실에 이상한 아저씨가 와서 뭘 팔아요." 오래전에 시내 인문계 여자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상적인 일이다.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우리 반 아이가 달려와서 말했다. 점심 식사 후에 노곤 해진 몸으로 졸음이 몰려오는 순간에 최악의 상황이다. "나가라고 했어?" 게으르고 안이한 교사의 반응이다.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요." 그때서야 포기한 듯이 몸을 일으켜 교실로 간다.


교실에 가니, 교단에 서서 무언가를 들고 떠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혹시나 덤벼들면 어떻게 하나 싶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강한 척하려고 얼굴에 인상을 쓴다. "아저씨, 무슨 일입니까?" "아 예... 00 학습지를 소개하려고요." "교실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것 모릅니까?" "아 저는 괜찮은 줄 알고요." "빨리 나가세요."


마음이 약한 외판원은 지시에 따라 일단 나간다. 대부분, 교사가 돌아간 뒤에 다시 들어와서 교실을 돌아다닌다. 학교가 제제할 방법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경력이 많은 외판원은 나보다 더 심한 인상을 쓰며 느릿느릿 물건을 챙긴다. 그리고, 인상을 풀지 않고 "학생들에게 좋은 내용인데 소개 좀 하면 안 됩니까?" 오히려 따지듯이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흠칫 놀란다. 일단 학생들 앞에서 체면이 중요했던 나도 지지 않고 눈썹을 일자로 만들면서 대응한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50% 먹고 들어간다니. "안됩니다." 간혹 억지로 나가면서 내가 들어라고 "에이 C, 더러워서~"라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을 잡친다.


사례 분석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이전의 사례들이라 현재 G7급 선진국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IT강국인 대한민국에는 이미 사라진 옛날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미, 학교 건물과 교실 출입문은 드라마에서 보듯이 아파트의 최첨단 도어록이 설치되어 외부인이 출입하는 것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학교 관계자가 아무도 모르게, 학부모가 학교에 들어와서 빈 교실로 가서 개인 사물함을 확인하였다고 하니 크게 변화된 것 같지는 않다.


사례 1에서 보듯이 학교의 출입 시스템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인이 학교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학교 건물 내부로 들어 올 수가 없어야 한다. 특히, '아저씨 누구세요?' '아저씨 나가세요!'라는 자발적인 대응이 불가능한 초등학교의 경우에는 더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화재 등의 비상시에 탈출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건물 내부에서는 쉽게 열 수가 있지만, 외부에서는 들어올 수 없도록 출입문 개폐 장치가 개선되어야 한다. 동시에, 각 교실문도 담임교사의 통제 아래에 개폐되어야 한다.


사례 2에서 보듯이 학교 출입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학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다. 학부모는 학교의 동의 없이 언제나 마음대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는 몰래 들어가도 되는 곳이 아니다. 학교는 몰래 들어간 것이 들켜도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학교는 오래전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 올리기 좋게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 에러


젊고 혈기왕성한 할머니가 손자의 손을 이끌고 학교로 달려가도, 학교로 들어갈 수도 없고, 아예 교실에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면 무단침입의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실수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담임교사의 동의와 안내가 없이는 교실에 접근이 불가능하였다면, 손자의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는다고 수사관처럼 개인 사물함을 뒤지는 엽기적인 행위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없지 않았을까? 왜 학교는 세상의 다른 건물보다 외부인의 출입에 대해서 더 관용적이어야 하는가? 시스템 에러다. 그런데, 학교의 시스템 에러는 왜 다른 세상보다 더 융통성 있게 허용되어야 하는가?


수영장 탈의실에서 자녀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아무도 없는 탈의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두고 간 옷 더미를 뒤졌다면, "아, 휴대폰 찾으신다고 우리 아이 물건을 뒤져보셨구나"하면서 다른 부모들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친구나 가족이 회사에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같이 가서 찾아보자고 해서, 퇴근 시간 후에 경비 근무자가 없을 때 사무실로 올라가서 텅 빈 사무실에서 모든 직원들의 책상을 같이 뒤졌다면, "오죽 답답하고 급했으면 그랬겠느냐?'라고 이해를 할 수 있을까? '같이 뒤진 사람도 직원의 가족인데' 그것도 이해해 주지 못하고 무단침입이라며 법적인 조치를 하는 회사를 보고 답답하고 인정머리 없다고 비난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학교는 왜?


학교가 고발했어야


'무단침입'으로 고발이 가능하였다면, 이미 우리 사회에서 적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규칙이 있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건물이든 절차 없이 막무가내로 들어가면 무단침입으로 처벌된다는 뜻이다. 다만, 학교에 대한 인식이 시대와 사회 변화만큼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학부모가 학생하고 학교에 가서 자기 교실에 가는 것이 어때서? 그게 학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건가?" "학생의 잃어버린 물건 찾는다고 학부모가 교실에 가서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 어때서?" "비어있는 교실에 들어가서 사물함 조금 살펴보는 것이 어때서? 그걸, 무단침입이라고 하나?"


학교는 다중이 사용할 수 있는 공적인 자산이다. 즉,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학교에, 누구든지, 적절한 절차나 동의 없이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된다. 무단침입이 적용될 수 있다면, 교사가 아니라 학교가 고발하여야 한다.


나는 슬픈 학교를 위해 울어 주기로 했다


사건을 재구성하고 행간을 읽으면 대충 상상이 간다. 어떤 모욕적인 언사가 동료 교사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담임교사의 귓전을 때렸을지 상상할 수 있다. '손자와 할머니'에 편향된 기사에 어떤 험한 댓글들이 담임교사의 눈앞에 펼쳐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아요~ 김선생, 좋은 것이 좋다고 좋게 해결하면 안 되겠소?" 늘 그렇듯이 학교의 관리자가 대충 이렇게 권고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는 담임교사와 학부모간의 사적인 분쟁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개입되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했을지도 모르겠다. 담임교사가 형사고발을 했다. 신문 기사는 인간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융통성 있게 해결하지 않고, 교사가 사소한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담임교사를 압박한다. 댓글과 여론이 달려들고 담임교사의 삶은 더욱 고달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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