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의 밖에서 방황하는 천재들을 위하여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맑은 날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남부 지역인 알가르브 지역은 일조량이 연간 약 3,000시간 정도이니, 서울의 연간 일조시간 평균 2,066시간에 비하여 30% 이상 맑은 날이 많다.
유달리 물난리 소식이 많은 한국과 달리 포르투갈의 여름은 기온은 높은데 건조하다. 건조한 날씨와 상대적으로 낮은 습도 덕분에 기온이 높아도 햇빛만 피하고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이다.
하지만,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서 산과 들은 풀이 바짝 말라 있고, 농작물은 심한 가뭄에 시달린다. 건기에 속하는 6월, 7월, 8월, 9월까지 4개월 동안에 평균 강수량은 겨우 3-4 mm 내외이다. 4개월 동안에 비가 안 온다는 소리다.
올 해도 국가재난센터에서 '지나치게 건조하고 높은 기온 때문에 화재의 위험이 아주 높으니 실외에서 불을 피우지 말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하지만, 지글지글 익는 강렬한 태양에 바스러질 정도로 바짝 마른 들풀은 인간의 실수가 개입되지 않아도 산불이 나기에 좋은 자연조건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10월이 되기 전까지 포르투갈 전역은 산불에 시달리고, 매년 국가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자연재해(天災)와 인재(人災)가 겹쳐서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들도 많고, 국내외의 다양한 상황이 맞물려 만들어 내고 있는 큼직한 이슈들이 많아서 한국에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뉴스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눈여겨보게 된 이슈가 있었다. 어느 영재학교를 자퇴하게 된 천재 소년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에 출연하였다는 방송도 보지 못하였고, 성장 과정과 영재학교 입학과 자퇴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거나 밝혀낼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천재 한 명이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경영론'을 지지하지도 않고, '타고난' 천재에 대한 억울함과 부러움에 따른 시기 질투심을 갖고 있지도 않다. 다만, 한 때 '영재교육과정 개발'이라는 연구 주제를 수행하면서 소위 '천재'들에 대해 살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천재를 위한 변명(天才之辨)을 해 보기로 했다.
세상은 표준을 정한다. 일반적인 기술 표준은, 기술적 필요성, 시장의 수용성, 산업 및 경제적인 요소 등의 상호작용으로 형성이 된다. 그에 반해, 사회적 표준은 범용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표준을 채택하고 준수하는 조직이나 개인이 보다 넓은 범위에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정하는 것이다. 공교육 체제도 사회 일반이 수용 가능하고 혜택의 범위가 넓은 범용적인 표준을 정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폭넓은 교육기관에서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학력 격차가 심했던 우리나라 일반계 학교의 학급에서 학습 내용의 수준을 설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학급 배정은 학년말에 개인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고 1반부터 10반까지 1등부터 10등까지 갔다가, 다시 역순으로 11등부터 10반에 배정하고 다시 순서대로 20등이 1반에 배정이 되는 방식이었다. 만약에 학생이 600명쯤 되었다면, 전교 1등과 600등이 한 반에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당시에, 학습 내용의 설정은 중간 수준 학생의 이해에 맞추도록 권고되었다. 물론, 일부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못 따라오는 놈들은 모두 버리고, 따라오는 녀석들만 데리고 가도록' 최상위 수준을 기준으로 수업을 진행하도록 권고를 받은 곳도 있다.
학업 성취도의 중간을 잡아서 동그라미를 그린다면, 동그라미 밖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수업 내용이다. 동그라미 밖 한쪽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어렵고, 동그라미 밖 다른 한쪽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너무 쉽다. 둘 다 우리가 설정하는 표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쉽게 눈에 띄어 대책으로 세운 것이 '학습부진아' 지원 교육과정이다. 하지만, 학업 성취가 탁월했던 상위권 아이들에 대한 지원은 오랫동안 없었다. 학습부진아와 같이 정규 수업에서 버려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학업 성취가 탁월했던 영재 아동들은 혼자서도 그럭저럭 해 내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별도의 지원이나 조치가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공교육 내에서 영재 아동들에 대한 교육적 처치의 부재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갖고, 영재 교육과정이라는 것을 고려하고, 연구하고, 공론화시켜서 영재학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영재학교들이 표준 밖의 아이들을 담아내는 융통성이 있은 유연한 그릇이 되기보다는, 또 다른 형태의 '우월한' 상위 표준을 형성하고 있지 않나 반성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빌 게이츠가 하버드 대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였을 때, 마크 저크버그가 하버드 대학교를 중퇴하겠다고 말했을 때, 우리나라 부모라면 설득하고 말려야 한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하버드는 졸업하자. 졸업장은 있어야 나중에 뭐라도 하지."
하버드 대학교를 중퇴한 한국의 빌 게이츠와 마크 저크버그는 나중에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때 부모님 말씀대로 졸업을 했어야 했는데." 하버드 대학교 동문 모임이라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여러 가지 사업마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중간에 끼어 고졸로 찬밥 취급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할 때마다 후회를 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표준을 정하기를 좋아한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정해진 표준의 최정점에 속하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확보된 자신의 상위 표준을 누군가 침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동시에, 표준 밖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표준을 지키도록 강제해야, 애써 확보한 자신의 상위 표준이 더욱 빛나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영재교육과정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까지는 아직 어린 아들 딸들이 발현되지 않은 천재이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서는 우리 아들 딸이 천재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표준에 벗어나지 않아서. 표준의 범위에 속해 있어서. 표준 밖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딱딱하고 유연성이 부족한 기존 교육제도의 고착된 체제를 벗어나 유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곳이 영재학교이다. 하지만, 이번 어린 천재의 이야기를 통해서, 영재학교도 더 이상 유연한 교육체제나 교육과정이 아님을 알게 되어서 아쉬웠다. 표준 밖에 있는 또 다른 표준이 된 것 같다. 그래서, 표준의 범위를 벗어나는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상실하고, 표준 밖의 표준을 벗어나는 또 다른 표준 밖을 인정하고 수용하기 힘든 환경이 된 것 같다.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내신 성적이나 학업 성취 평가가 아이들이 서로에게 친절하고 배려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알고 싶지 않아도, 알지 않으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읽히는 것을 괴로워하는 설정의 SF물이 있다. 천재들의 재능은 이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타고난 재능을 감추고 쓰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고 읽히고 이해되고 알게 되는 것이다. 애써 눈감고 모른척해도 보이고 읽히는 것을 어떻게 하겠나?
자신의 재능을 잘난 척하며 으스대고픈 성향의 천재들도 있겠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천재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실제로 '밥맛 없는' 천재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밥맛없이' 여기는 천재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이 천재들의 숙명이다. 그렇게 타고난 것을 어쩌겠는가?
SF 영화처럼, 때로는 세상의 주목과 찬사를 받는 반면, 때로는 그들의 특별함과 다른 점 때문에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타고난 재능만큼이나 표준의 세상 속에서 홀로 감당해야 할 무게, 이것이 천재들의 숙명이다.
세상 아무 곳에나 가져다 놓아도 적당히 어울리는 평범함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능력이 출중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압적이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여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표준적인 평범함에 감사할 따름이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세상이 정해 놓은 표준에 맞추려고 허겁지겁 겨우겨우 살아가는 지극한 평범함이 오늘은 다행스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