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에서 연회비가 제법 비싼 헬스장을 다닌다는 지인이 전해 준 말이다. 국내 대기업의 고위직 임원으로 계시는 분이 운동을 하러 오시는데, 언론을 통해서 잘 알려진 분이라 지인도 그분을 쉽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세계에서 선도적인 가전 기업의 리더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품고 있어서 기회가 되면 인사라도 드리려고 주변을 얼쩡거렸지만 빈틈없는 깔끔한 외모에 철저한 일정 관리를 하는 것 같아서 쉽게 끼어들 기회를 갖지 못했다. 물론, 아이돌 팬클럽 멤버처럼 열정적인 팬심으로 돌격하지 못하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는 나름의 자존심도 작용을 하였으리라. 기회가 될 때마다 짝사랑하는 십대처럼 우연을 가장하여 계획적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날 러닝 머신에서 단정한 머리칼로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는 그분을 발견하였다. 운동하는 중에도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듯이 항상 태블릿이 앞에 올려져 있었다. 세계적인 기업을 이끄는 분이니 어떤 콘텐츠를 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그래서, 그날은 의도적으로 러닝 머신 뒤쪽을 천천히 지나가면서 안보는 척하며 인간의 신체적인 능력을 넘어서는 초능력을 발휘하며 눈동자를 거의 90도 각도로 꺾어서 러닝 머신 위에 올려놓은 태블릿을 훔쳐보았다. 드라마에서 처럼 외국어로 방송하는 해외 경제 뉴스나 복잡한 그래프가 나열된 주가 동향의 현란한 화면을 상상하면서.
어? 뭐지? 아... '나는 자연인이다'. 러닝 머신 위에 올려진 최신형 태블릿 화면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이었다. 산간 오지에 고립되어 혼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독특한 생활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주로 깊은 산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홀로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을 해당 프로에서는 '자연인'이라 부른다. 종편 시사교양 프로그램 중에서 시청률이 높은 편이며, 중장 노년 남성 시청자의 지지도가 높아서 낚시 방송 프로그램인 '도시 어부'와 함께 '아버지들의 무한도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남자들은 똑같다
남자들은 똑같다. 과도한 단순화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타박해도 좋다. 단정한 머리칼로 최첨단 기업을 이끌고 있고, 부의 상징인 궁궐 같은 타워에 살고 있는 CEO에게도 아무도 없는 산골에서 작은 오두막에 혼자서 옹색하게 살아가는 자연인들의 생활이 남자들의 이해하기 힘든 망측한 로망이라는 점이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다가 잡초나 잡목 군락 속에서 이름 모를 약초를 귀신같이 찾아내는 자연인을 보게 되면 신기술로 세상을 변화시킨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보다 더한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된다. '대단하다!'. 흔들리는 카메라를 따라가다 보면 벌써 내가 자연인이 되어 산속을 헤매고 있다.
도시를 떠나 산으로 들어오게 된 사연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자연 속으로 들어와서 마음이 편해지고 건강도 찾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카메라 앵글 밖에 있는 자질구레한 생활의 흔적들은 보이지 않고 독특한 삶의 모습만이 부각되다 보니,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해 보이고 자연 속에서 마음대로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 같아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후달리는 도시 남자들에게는 세상으로부터 혼자 고립되어 살아 보고 싶은 비현실적인 환상을 대신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즐겨 보는 프로그램인데, 시청하고 있는 나의 뒤통수에서 무슨 쓸데없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냐는 듯이 "쯧쯧"하는 아내의 면박을 들으면서도 늘 완전한 고립과 완벽한 독립을 꿈꾸고 있다. 가정의 행복과 가족 간의 돈독한 유대를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이율배반적이고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소년 소녀 세계문학전집
초등학교 4학년 때 즈음,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 소녀 세계문학전집'이 2단으로 된 나무 책꽂이에 꽂혀서 우리 집에 도착하였다. 모르긴 해도, 정이 많았던 선친께서 퇴직한 직장 동료의 부탁으로 억지로 맡아서 할부로 받아 왔을 것이다. '또 이런 것 들고 왔다'는 모친의 타박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구입되어 벽을 장식하고 있었던 '조선왕조실록' 등 이름 모를 성인용 할부 전집류 사이에서 처음으로 내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생겼다. 전체 50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책들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에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책이기도 했다. 그래서,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해당 전집에 대한 팸플릿. 책꽂이 위에 올려진 사과 하나가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소품 아이디어였다. 믿거나 말거나.
1권에서 그리스 신화를 만났고, 2권에서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었고, 3권에서 성경의 인물들을 만났고, 6권에서 찰스 램의 요약본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섭렵했고, 8권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 9권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영미 문학사의 주요한 작품들을 만났고, 이솝, 그림, 안데르센을 포함한 서양의 동화책들을 대부분 망라했고, 나중에 성적인 묘사가 노골적인 무삭제본을 읽은 뒤 순수함이 상실된 39권 어린이용 아라비안 나이트도 읽었고, 인도, 중국, 일본의 동화를 넘어서, 42권 서유기, 43권 삼국지, 44권 수호지에 이르는 중국 3대 고전을 섭렵하고 한국의 고대 소설과 전현대의 전래 동화까지 읽어 내면서 동서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이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보고 듣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어린 나에게는 50권의 책 한 권 한 권이 모두 독립된 하나의 세계였다. 지나와서 생각하니, 50권의 책을 통해서 단 한 권의 책 밖에 읽은 적이 없는, 단 하나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경계해야 할 꽉 막힌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여러 가지 우연을 통해서 내 앞에 던져진 가장 큰 행운이었다.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 책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 책이 10권 '로빈훗의 모험'이었다. 스무 번 이상은 읽었을 것이다. 로빈훗이 죽어가며 리틀존에게 자기 화살이 떨어진 곳에 자신을 묻어 달라며 당부한다. 이미 쇠약해진 로빈훗이 당긴 마지막 화살이 힘없이 핑하며 떨어지는 장면에서 늘 눈물이 났다.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생애 최초의 경험이었다.
나는 왜 고아가 아닐까?
계몽사의 전집에는 유달리 모험과 유랑의 이야기가 많았다. 50권 중에서 7권 플란다즈의 개, 11권 피이터 팬, 16권 톰 소오여의 모험, 22권 집 없는 아이, 23권 십오소년 표류기, 34권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등등 대부분 어린 주인공들이 고아 거나 혼자 거나 아이들이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이었고 특히 내가 좋아했던 책들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도 주인공들처럼 세상을 이리저리 떠 돌아다니며 모험을 해 보고 싶었다. 고아가 되어 돌보아 줄 사람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는데, 길을 걷다가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하려고 길 가 건초 더미에 누워 하늘을 올려보는 장면은 너무나 멋지고 부러웠다. 그런데, 공무원이 셨던 선친과 전업 주부로 헌신적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신 모친과 여동생과 남동생으로 구성된 다복하고 지나치게 안정적인 가정이었다. 그래서, 좌절했다. 안타까워하며 한탄했다.
"아~ 나는 왜 고아가 아닐까? 고아면 좋겠는데..."
고아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짐작할 수 없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생각이었다. 한국에서는 여러 도시를, 유럽에서는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급기야는 세상 끝까지 와서 고아처럼 살고 있는 지금의 나를 보면서 '고아면 좋겠다'는 소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에 길러진 성향이 지속적으로 나의 삶에 영향을 미쳐서 현재를 구성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
책 때문이야
다 책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때문이다. 전집의 구성이 달랐다면 내 인생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프리카의 메마른 들판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모두들 밥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시절에, 그 책들 덕분에 간혹 엉뚱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꿈을 꾸고 새로운 모험을 기대하며 두려움을 호기심으로 바꾸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맨발로 들판에 서 있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구호물품과 함께 책도 전달되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책은 마음의 밥이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나의 유년 시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