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나조차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처음에는 오직 영화 기록용으로만 사용하려고 했던 브런치스토리였다.
'일기는 일기장에'가 내 모토였고, 생각은 혼자 갈무리하여 어딘가에 잘 정리해 놓으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내가 느끼는 날것의 감정을 타인에게 공유하기 부끄러웠고, 나의 감정은 치부로 느껴졌다. 나를 특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온라인에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있어 항상 부끄러움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스스로 항상 '나는 잘났다'라고 말하면서 진심으로 잘났다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잘나기 위한 노력을 한 적은 그다지 없었다. 적은 노력으로 고만고만한 성취를 이루고 남들이 추켜세워줄 때 '꽤 잘났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했을 뿐, 속 깊은 곳에서 잘났다고 스스로를 보듬어 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과거의 나를 비난하고 헐뜯고 매도하게 됐다.
십대의 나도, 이십대의 나도 퍽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이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면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는다.
타인에게는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데도, 나 자신에게는 쉽지 않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글을 써 왔다.
어떤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에 재미를 붙인 지는 거의 이십 여년이 되었고, 글쓰기를 완전한 직업으로 삼은 지는 몇 년이 지났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잘 쓰지 않는다.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무언가 턱 막힌다. 두려움인 것 같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염려스럽다. 나는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앞서 말했듯 내가 나를 신뢰하지 않아 타인 역시도 나를 신뢰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기저에 너무나 완고하게 깔린 생각이라 의식적으로 계속 지워 주지 않으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근 몇 년 동안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아주 조금씩 체득하고 있었다.
내 존재를 이렇게 외부에 드러내는 것 또한 그 일환이다.
나는 정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친구들을 제외하면 굳이 새로운 사람을 더 알아가고 싶지 않았다. 타인이 나를 재단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두려웠다. 나조차도 타인을 쉽게 평가하고 멀어지면서.
나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내 마음까지 전부 사랑하고 싶으니까.
브런치에는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천천히 쓸 것이다. 영화 기록도 종종 함께.
작가가 태생인지라 관심이 있다면 기쁘겠지만, 동시에 또 두렵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무관심 속의 글이 되어 버릴까 봐. 온라인에 발간된 글은 무관심이 곧 무가치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아니, 내 머릿속의 매커니즘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서, 그저 관심의 유무로 가치를 판단하게 된 것은 아닐까?
문득 깨달음이 들었고, 이 한 문장을 쓰는 데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도움이 된다.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이 일기가 몇 개쯤 쌓이면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1 주차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