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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안 : 하나의 개체로 독립하기까지

어차피 삶은 혼자야, 뭘 더 바라?

by 화양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바바리안>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바바리안. 거칠고 야만적인 종족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바바리 가'에 사는 인물이자 야만적인 어떤 자를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인 제목이 된다.


사실 이 영화를 본 건 순전히 빌 스카스가드가 나와서인데, 공포영화엔 쥐약인 나는 이 영화를 고르기까지 정말 많은... 고뇌의 시간을 거쳤더랬다.

하지만 11월 1일에 넷플릭스에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 이 글을 보는 여러분도 기억하시길) 빨리 영화를 켰다.


그리고 뜻밖에도, 단순한 공포영화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됐다.

이 영화는 한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로 독립해 나아가는 작품인 것만 같다.





본 게시글에는 영화 바바리안 (202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날,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하여 묵게 된다. 그런데 이 집에 더블 부킹이 되었음을 알게 되고 항의를 위해 전화하지만, 고객센터는 전화를 받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집을 점거한 상대하는 남자다.


영화의 연출상, 처음에는 이 남자가 진범인가? 이 남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건가? 의문을 갖고 불안하게 만든다. 여자가 불안해하는 마음에 이입하고, 남자가 취하는 행동(호의를 보인다든지, 관심을 갖는다든지) 등에 의구심을 표하며 남자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남자의 사망으로 인해 진짜 위협은 이 남자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집 안에는 다른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집에 머무르고 있던 한 '여자'다.


이 '여자'는 '여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이면서도 무언가 기이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간과는 다소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러 노출시킨 나신에서 여성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고, 강박적일 정도로 '육아'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이 '여자'가 '어머니'라는 역할에 매여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니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 작품은 그저 괴물을 쏘아 없애고 무사히 탈출하는 보편적인 공포 영화의 엔딩이다.

그러나 총구를 겨누었을 때, '어머니'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주인공이 결국 '어머니'를 쏘아 없앴다는 점. 나는 그 마지막 장면이 이상하게 강렬해서 아주 오랫동안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 작품의 주 등장인물은 '어머니'와 주인공, 그리고 잠시 등장하는 거래처 인물을 제외하면 전부 남성이다. 공포영화의 특징을 생각하면 뭐 그렇게까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마주치는 대부분의-괜찮은, 혹은 괜찮지 않은- 인간이 남성으로 대변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어떤 남자는 젠틀하지만 나를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남자는 인간적인 구석이 있지만 조금 양아치 같은, 어떤 남자는 나를 도와주는, 어떤 남자는 도와줘야 하지만 도와주지 않는, 어떤 남자는 범죄를 저지르고 죗값을 치르지 않는 그런 장소에, 주인공은 서 있다.


주인공은 상대에게 동료애, 혹은 인류애를 느끼는 것 같다. 보는 나는 어쩌면 저 사람이 동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혼자일 수 없으니까. 그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아무도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한다.

첫 번째-연인- 남자는 주인공을 사랑하지만 주인공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번째-외부인- 남자는 주인공을 도우려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세 번째-집주인- 남자는 주인공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주인공을 사지로 내몬다.


주인공은 그래서 계속 혼자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여성은 그러면, 주인공을 이해할까? 반대로 먼저 생각해 보자.

주인공은 이 '어머니'를 이해하고 있다. 주인공은 유일하게 이 '어머니'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그것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다른 이들은 기겁하고 도망치고 달아나는 동안,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어머니'가 좋아할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주인공은 훌륭한 자녀다. '어머니'가 주인공을 어떻게 싫어할까? '어머니'는 결국 주인공이 추락하자 몸 바쳐 구해 주기까지 했다. 그건 일종의 살신성인이고 보호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를 다치게 한 남자를 없애 버린 것이다.


주인공이 '어머니'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쏘았을 때, '어머니'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인공의 마음을 드디어 '어머니'가 이해했기 때문일까? …… 아니면 무엇일까?


주인공은 마침내 '어머니'를 쏘고 '집'에서 벗어난다. 여태 어떻게 해도, 무슨 짓을 벌여도 사라지지 않던 '어머니'가, '아이'의 손으로 인해 고리를 끊고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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