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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셜리 클럽 : 나를 구성하는 것들에 관해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가?

by 화양

오랜만에 브런치에 발을 들였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전업 프리랜서였던 내가 취업을 하고, 운동을 시작했고, 생활 습관이 완전히 바뀌었고, 뭐……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여하간, 뭔가를 꾸준히 기록하는 버릇은 여전히 들이지 못했다. 24년이 다 끝나 가는 지금에서도 말이다.


뭔가를 길고 완벽하게 작성하려는 내 버릇이 문제인 것 같아서, 이제는 최대한 단촐하게 작성하는 방향으로 가 보려고 한다.

기록을 남기는 건, 그때는 귀찮고 품을 들이는 일 같아도, 지나고 나면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자산을 누군가 재미있게 보고 공감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고.


잡설이 길었다. 여하간, 오늘 읽은 책은 <더 셜리 클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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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더 셜리 클럽>의 줄거리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더 셜리 클럽은 '셜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만이 소속될 수 있는 클럽이다. '셜리'라는 이름에서부터 느껴지지만, 작품의 배경은 한국이 아니다.

주인공은 호주로 워홀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S라는 한 사람을 만난다. 성별도 불분명하지만 그에게서 딱 하나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목소리가 보라색이라는 것이다.


목소리가 보라색이라는 건 대체 뭘까?

흔히 우리가 공감각적 심상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청각의 영역일 목소리에 당연하게도 시각의 영역일 색상을 부여하는 행위는 말이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보라색이라고 하면, 우리는 목소리의 질감이나 느낌을 우리 나름대로 해석하고 상상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보라색은 누군가에게는 씁쓸한 색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따스한 색이며, 누군가에게는 우울한 색일 것이다. 나에게는 보라색이 어둡고 먹먹한 인상을 주는 색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색이란 건 개인의 기억이나 사회적 관념이 인상을 크게 좌우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목소리를 색으로 정의한다는 건 무척이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작업인 것이다.


주인공은 '더 셜리 클럽'의 행진을 보고 단숨에 매료되어, 가입을 원하게 된다. (S와 만나게 된 이유도 사실은 더 셜리 클럽에 가입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가족도 친지도 없는 낯선 땅에서 주인공은 '더 셜리 클럽'에 소속하게 된다. '셜리'로서. '셜리'들은 그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을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어떤 사람일지 의심하지도 않고 헐뜯지도 않는다. 국적과 나이가 그렇게 다른데도.

같은 한국 땅에서 왔다고 주인공에게 무작정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주인공이 '우리는 한국인이니까'라며 더 똘똘 뭉치고, 더 친근하게 굴고, 하우스 메이트들의 비위를 맞춰 줬다면 호의를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그러지 않았다.

주인공은 '셜리'였으니까.


무엇이 나를 정의하는지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사람이다'와, '나는 사람이고 싶은 사람이다'와는 다르다─(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작중에서 계속해서 다루는 주제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찾는 것이 뭔지, 나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이름은 무엇인지.

나는 어디에 소속되는지.


그런 것들에 관해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정의하는지에 관해서.

그런 것들은 여러 가지 관계, 상호작용, 사회와의 마찰 속에서 깎이고 부딪치면서 점점 또렷해지는 것이지만.

'셜리'가 그러하듯 나의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는 건, 그건 정말 중요하고 위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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