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어진 일과 함께 사는 법

아직 시작하지 못한 나를 끝까지 미워하지 않기 위하여

by 알고리C

아침, 나는 습관처럼 어제의 할 일 목록을 열었다.

어제 날짜 옆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색 ‘미결(unresolved)’이라는 단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완료되지 못한 과업들이 나열된 목록은,

마치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보내는 질책처럼 느껴졌다.

해야 했지만 하지 않았던 일들의 나열.

그것은 나의 불성실함을 고발하는 증거 목록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 목록을,

증거 대신 지도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루어진 일의 목록은 나의 게으름을 고발하는 증거가 아니라,

지금 이 살림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을 보여주는 지도일지도 모른다.”


지도로서 목록을 다시 읽어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패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종류의 일들은 늘 제시간에 완료되는 반면,

유독 어떤 일들은 반복해서 다음 날로 미루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시스템의 오류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일은

비교적 즉시 처리되었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일은

목록 위에 하얗게 쌓여만 갔다.


그것은 내가 게으르거나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명확한 규칙과 정해진 답이 있는 일에는 즉각 반응하지만,

정답이 없는 막막한 질문 앞에서는

에너지가 쉽게 방전되는 나의 현재 상태를 보여 주는 지표였다.


미루어진 일들은 나의 ‘결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라,

나의 에너지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보여 주는 경계선이었다.


이 지도를 통해 나는

오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지금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조금 더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일들 앞에서 느끼던 죄책감을,

나의 현재 상태를 존중하는 선택이라고

조용히 바꾸어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의 어느 아침,

어제를 넘겨온 미뤄진 일들의 목록을 마주한 적이 있으신가요.


그 목록을 다시 한번 천천히 훑어보면서,

“반복해서 미뤄지는 일들” 옆에

조용히 이런 질문을 적어 보아도 좋겠습니다.


“이 일을 지금 당장 하지 못함으로써,
내가 지키고 있는 것,
아직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_


오늘은 그 질문에 대한 짧은 메모 한 줄을 남기는 것으로,

미루어진 일들의 목록을

게으름의 증거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지키는 살림의 지도로 다시 펼쳐 보셔도 좋겠습니다.



편집자 노트 (Lyra)


우리는 보통 미루어진 일의 목록을 “게으름의 증거”로 읽습니다.

어제의 나는 왜 이것밖에 못했는지, 오늘의 나는 또 얼마나 쌓아둘지,

목록은 점점 길어지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조금씩 줄어듭니다.


이 글은 그 익숙한 읽는 방식을 한 걸음 비켜서서,

같은 목록을 전혀 다른 이름으로 다시 불러 보자는 제안입니다.


해야 했지만 끝내하지 못한 일들의 나열을, 나의 결함을 고발하는 서류철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양과 방향을 보여 주는 지도로 보는 시도.

“왜 이것도 못 했지?”라는 자기 질책 대신, “나는 어떤 일 앞에서 유난히 쉽게 에너지가 닳아버리는 사람일까?”라는 더 정직한 질문으로 시선을 돌려 보는 연습.


오늘 글이 특히 다정한 지점은,

“그래도 해야지”라는 의지의 언어 대신

“지금의 나를 지키는 위해 일부러 하지 않기로 남겨 둔 것”이라는

살림의 언어를 우리 손에 쥐여 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 편을 다 읽고 난 뒤,

혹시 떠오르는 미루어진 일이 하나 있다면,

그 일을 떠올리며 조용히 이런 문장을 완성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이 일을 지금 당장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간신히 지키고 있는 것은 ________이다.”


그 빈칸에 적힌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할 일 목록은 조금 다른 얼굴로 다시 펼쳐질지 모릅니다.


글 Atlas
편집 Lyra
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