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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 Feb 19. 2023

초이스되는 몸들 (연재)

동물 체험 카페와 성노동 산업의 교차 (1)



작년 11월, 야생동물 체험카페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학대사건이 드러나 동물권에 관심있는 이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이익을 위해 동물을 전시하고 수단으로 삼는 ‘동물카페’ 가 한국 시장에 처음 등장한지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개인 동물사업장들의 학대들이 감춰져 있었을테고, 그것들이 여전히 언론에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지 생각해보면 특별히 이번 개별 사건의 끔찍함을 이 글에서 나열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카페’와 동물 '체험' 이라는 형태가 결합된 사업장에서 소비자들이 얻고자하는 것은 결국 휴식을 겸한 동물로부터의 돌봄. 혹은 색다른 체험이다. 보드라운 털을 만지면서 맛있는 것을 먹거나, 접하기 힘든 동물과의 시간을 보내며 사진을 찍는 경험을 하러 소비자들은 일반 카페보다 비싼 돈을 내고 동물 카페로 모여든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은 아주 값이 저렴하게 매겨지는 노동이다. 서로의 ‘Like’까지도 돈으로 사는 것이 되어버린 근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돌봄’ 역시 상품화된다. 인간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들은 갖가지 형태로 상품이 되어 시장을 떠돌고 있다. 여기서 동물 카페, 혹은 여타 다양한 동물+서비스산업이 추구하는 바가 대부분 타인과의 상호관계를 가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에게 애니멀테라피, 즉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부분에 대해 주목해보자는 것이 이번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동물카페의 동물들은 인간에게 돌봄과 새로운 자극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며 근대의 소외를 해소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하고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카페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은 인간 노동자 뿐 아니라 동물 카페가 그 정체성을 갖게 만드는 비인간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처음 ‘동물카페’ 산업에서 돌봄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마도 성노동자로서 필자의 경험이 큰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가지 예로 노래방 업종을 설명하자면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풍경은 이렇다. 구매자는 룸에 들어가서 여러 아가씨들 중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초이스‘하고, 그 아가씨와 약속된 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술을 마시고, 스킨십을 하는 것을 통틀어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성노동자는 다양한 성노동 업종 현장과 구매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구매자들로부터 돌봄을 요구받게 된다. 그리고 제공하게 되는 성적 서비스에는 그에 상응하는, 구매자가 요구한 돌봄노동이 포함되게 된다. 구매자는 성적인 욕망 뿐 아니라 사회 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두려움, 불안, 애정 결핍과 같은 것들을 성노동자에게 털어놓고  그에 상응하는 스킨십을 하고 태도를 보임으로서 해소한다. 일종의 육체적인 테라피로서 얻어가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고양이 카페에 들어선다. 마음에 드는 고양이를 발견하고, 그 고양이를 쓰다듬고 간식을 주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틀어 비용을 지불한다. 당신은 잠깐이지만 사회에서의 고민거리, 걱정거리를 잊고 포근한 고양이의 온기를 느끼며 행복해했다는 부분에서 위로를 받는다. 일종의 애니멀 테라피에 대한 비용을 지불한 것이다.


 여기서 고양이와 노래방 아가씨는 동일하게 구매자를 대기하고, ‘초이스’ 받고 돌봄노동을 기대받고, 그것을 수행함으로서 비슷한 노동 시스템 안에 위치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고양이와 노래방아가씨는 사회의 시선으로 따져지는 얄궂은 ‘음지’와 ‘양지’의 구분을 제외하면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가? 아주 다른 듯 보이는 룸살롱과 동물카페는 이렇게 ‘돌봄’이라는 지점에서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그 산업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의 이면을 대조해보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더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하기 이전에,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동물전시/카페 사업장에 있는 비인간동물들이 과연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노동- 동물카페에 갇힌 채 거주하고, 매일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며 스킨십을 해주거나 본인의 생활양식을 노출시키는 것- 에 상응하는 댓가를 받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인간의 ‘노동’ 이 노동이기 위해서는 몇가지 충족조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상호간에 이 거래에 합의하겠다는 동의를 거치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노래방 아가씨의 경우에도 이 거래에 합의를 했다는 점에서 동물카페의 동물들과는 매우 다른 위치에 있다. 동물카페의 비인간동물들은 동물카페에서의 노동에 합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인간의 경우 합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노동을 시킬 때 그것은 착취, 노역이 된다. 마찬가지로 동물카페의 비인간동물들도 착취, 노역을 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주장에 무언가 과장이 있다고 느껴진다면, 아마 이런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은 아닐까. 고양이카페에서 배를 뒤집고 누워 기분좋은 듯 보이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힘들게 노동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 고양이. 손님들이 주는 간식을 맛있게 먹고 장난을 치며 신나게 노는 라쿤카페의 라쿤. 우리가 동물카페를 떠올렸을 때 쉽게 떠오르는, 걱정없이 ‘무위도식’하고 있는 듯 보이는 동물들의 모습. 만약 그런 것이 떠올랐다면 정확하게 비인간동물을 이미지 메이킹하여 자본으로 만들어내는 사업자들이 소비자를 속이는 것에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동물카페의 그들은 별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각 개체 동물들은 인간이 그렇듯 행복하게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개체마다의 욕구와 건강이 존중될 수 있어야하지만 일괄적으로 ‘상품’으로서 관리되는 동물전시/체험카페에서 그러한 일상이 영위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비인간동물과 함께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동물에게 간식을 무한정 공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물카페에서 간식은 상품으로서 판매 될수록 좋기 때문에 손님에게 판매가 권장되고, 적정량이 체크되거나 건강상태가 관리되지 못한 채 동물들은 간식을 계속해서 공급받게 된다. 라쿤,미어캣,카피바라 등 충분히 서식환경과 비슷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곳에서 ‘감금’당하며 전시되는 개체들의 경우에는 스트레스로 인해 서로 공격해 죽이거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등 정형행동을 나타내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야생동물의 경우 반려동물에게 적용되는 동물보호법이 적용되지 않아 구조,학대상황에서 격리 보호조치도 어려운 케이스도 나타난다.


 그동안 이렇게 동물카페의 동물들이 ‘무해하고 안전하게’ 행복해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아무 문제없이 노출되고 판매되어왔다는 것은, 정확히 그것을 마케팅하고 연출해서 그 모습을 판매해온 비인간동물을 포섭한 자본주의가 성공했다는 반증이다.  동물들이 불편해보이고, 불행해보이는 모습은 돈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완벽히 그들이 행복해 보일 수 있는 장치들 속에 소비자인 우리들을 초대해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안전하고 편안해하는 모습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행복해 보인다고 해서 동물카페에서 체험-전시되고 있는 동물들이 착취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좋은 복지가 갖춰진 회사에서 즐거운 업무를 하더라도 꼭 월급을 받아야 하고, 사무실에서 퇴근하지 않고 살 수 없듯이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짚어야 할 중요한 또 한가지의 지점. 이들은 착취되고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이 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노동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비인간동물의 노동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만약 이런 일자리가 주어진다고 상상해보자. 마음대로 숨을 수 없는 오픈된 공간에서 하루 12시간 근무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당신을 관찰하고 만지고 먹을 것을 주고 사진을 찍는다. 당신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잠시 엎드려 쉬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당신의 관심을 갈구하고 몸을 쓰다듬는다. 근무한 것에 대한 보수는 먹을 것과 잘 곳 뿐이다. 당신은 이 일자리를 택하겠는가?


 성 산업과 동물전시/체험 카페 산업 사이를 대조하는 이야기를 할 때, 이 차이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음 달에는 이 두 산업이 교차되고 다시 떨어지는 지점, 자본주의 안에서 돌봄을 수행하는 이들이 어떻게 다뤄지는지와 돌봄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또 이 산업에서 쫓겨나는 경우 이들이 어떻게 ‘처리’ 되기를 요구받는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음 달 매거진 솔스에서 다뤄보려고 한다.



글쓴이: 달연

이것저것 해방운동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에 확신이 없어 자기소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밴드 낯선무화과와 타투 작업을 겸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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