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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 Mar 24. 2023

가시화되지 않는 돌봄

동물 체험 카페와 성노동 산업의 교차 (2)

�� 지난 글 읽으러 가기 ��

 아침에 스마트폰이 깨워주는 알람으로 눈을 뜬다. 지난 밤 쓸쓸한 심정을 트위터에 쏟아부었더니 팔로잉 되어있는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었다. 함께 사는 고양이가 다가와 몸을 부비며 고로롱댄다. 간식을 주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다. 고양이의 온기를 느끼며 조건만남 계정으로 로그인한다. 나의 보살핌을 받고싶어하는 손님들에게 메시지가 와있다. ‘언제 시간돼?’,‘오늘 너무 힘들었어ㅠ’, ‘보고싶다..’‘니00 0고싶다ㅠ’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창문을 연다. 맑은 하늘을 보고 숨을 크게 쉴 수 있다.



 위의 서술은,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해본 어느 성노동자가 하루를 시작하는 풍경이다. 이 보통의 풍경에서 몇 번의 돌봄이 오고갔는지 세어볼 수 있는가? 비-인간동물에서부너, 지구의 자연, 온라인상으로 오고간 인간관계, IT서비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돌봄을 주고 받는 것의 연속이다. 아주 일상적으로 숨쉬듯 행위되는 우리 사이의 ‘돌봄‘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종과 종, 매체를 넘나들며 모든 생명, 지구의 자연을 아우르는 활동이다. 우리가 이 지구에서 맺은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돌봄은 우리가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지구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힘의 강력한 원천이다. 


 하지만 우리가 돌봄을 ‘노동’으로 간주하게 되는 때에는, 자주 그것은 ‘간병’ 이거나 ‘육아’로 제한되고 정의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시간과 가치가 ‘돈’으로 환산 가능해야 했고, 돌봄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 벌 시간에 쫓겼고, 고강도 돌봄에 쏟을 시간이 부족해졌다. ‘사랑‘의 영역에 남겨졌던 것들을 자본주의는 점차 돈으로 수탈해갔다.

그리고 그렇게 ‘돌봄 노동‘이 이야기 될 때에는 주로 돌봄을 ’베푸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가 정해져 있게 되었다. 돈을 주는 ‘고용인’과 받는 ‘피고용인’이 생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돌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비대칭 적인 권력관계라고 생각되며, 늘 돌봄을 받는 이는 자율성이나 취약성이 없는 존재로 규정되어왔다. 하지만 돌봄이 본디 그러한가? 베푸는 자와 받는 자가 나누어지는 행위인가? ‘취약한 자’만 돌봄을 받고 있는가? 사회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이가 받는 돌봄은 노동으로 여겨질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서, 이 글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국사회에서 성노동자가 주로 돌봄을 베풀 게 되는 구매자들은, 한국 시장에서는 대부분 장애를 가지지 않은, 그리고 구매력을 가진 남성이다. 이들은 늘 사회에서 취약하지 않은 모습만을 보여지기를 요구받고 있다. 하지만 성노동자 여성 앞에서 자주 이들은 무장해제 되거나 과장스럽게 허세를 드러내며 인정받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를 사랑해주기’ 라는 서비스를 구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걸까. 본인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서도 인정받고, 위로받기를 원하는 구매자를 위해 성노동자는 성적 서비스와 돌봄을 수행한다. 구매자가 원했던 ‘사랑받는 느낌’, ‘누군가와 함께 있는 느낌’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성노동자들은 구매자들이 회사에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감내해야 했던 찌꺼기 같은 소외감, 박탈감 등의 감정들을 더 견딜 수 있도록 돕고, ‘견딜 수 있게 된‘ 남성들을 만들어냄으로서 이 체제가 계속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성노동자는 사회와 미디어에서 여타 돌봄 노동자처럼 ‘숭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 못한다. 왜일까? 성노동자들이 돌보는 남성 구매자들은 다른 돌봄 노동자들이 돌보는 이들처럼 충분히 ‘불쌍한’ 외양을 하지 못해서일까?

 이번에는 비인간동물들이 동물카페, 체험 등의 산업에서 돌봄을 베푸는 대상으로 초점을 맞춰보자. 이들은 구매력이 있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귀엽거나 특이한 동물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 누구나 이들의 돌봄을 구매할 수 있다. 전시-체험 동물개체들이 감당하는 것은, 견디는 것이다. 사람들의 손길과 눈길 버티기. 만져도 가만히 있기. 쳐다봐도 못 피하기. 생태환경과 맞지 않는 곳에서 살아남기. 그렇게 그들이 ‘견디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부드러움, 귀여움, 경이로움, 독특함을 구매 하고 이윽고 그들과의 시간을 얻어낸다.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은 비인간동물에게서 위로를 받고 유쾌함의 가치를 찾아낸다. 하지만 그들이 ‘돌봄’,‘노동(더 정확하게는 착취,혹은 강제노동이라고 해야 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에 비해 가시화되지 않았다. 왜일까? 그들이 인간만의 언어로 항의하고, 괴롭다고 말하지 못해서일까? 이 산업이 너무 공고하게 비인간동물의 착취,강제 노동을 그들의 불가피한 운명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버려서일까?


 물론, 사회에서 돌봄노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호스피스, 간병, 육아, 재생산, 청소노동의 돌봄 노동도 그저 말로만 ‘숭고하다’고만 여겨질 뿐 현실에서의 처우는 전혀 숭고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러한 노동들은 삶을 굴러가게 만들고 세계가 굴러가게 만드는 필수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영화 <다음소희>의 대사처럼,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받는 것이 이 시대 돌봄노동의 현주소이다. 어떤 유익함도 만들지 않지만 높은 보수와 좋은 처우를 보장받는 금융계 종사원,재무담당 변호사 등 관료적이고 형식에 불과한 불필요한 일자리. 흔히 말하는 ‘불싯 잡’ 에 비해 처절하게 낮은 임금과 차별을 받는. 이 시대에 돌봄의 가치는 딱 그 정도이다. 하지만 이 지면은 이토록 빈곤한 처우를 받는 ‘돌봄’의 논의에서도 미끄러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미끄러진 것은 성노동자와 비인간동물 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돌봄도 자본화되고 침략당한다. 깨끗한 물을 사먹어야 하는 것은 물론. 숲속을 거닐면서 맡을 수 있었던 피톤치드는, 방향제로 무료 배송 받을 수 있다. 따뜻한 햇살은, 식물등과 무드등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삼림욕장에 들어갈 때도 입장료를 내야 한다. 자연의 더 많은 것들이 자본주의에 침탈당하게 되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얻던 돌봄 중에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 모두 자본화 되기 전에 기후위기가 도래해서, 인간이 멸종하는 시기가 더 빨리 올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이 자본주의와 성장주의로 우리가 초래하게 된. 자연이 우리를 돌보지 않기로 선언하는 마지막 모습이리라.


 잠시 원시 인류의 세상을 상상해보겠다. 아니, 혹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유토피아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는 돈으로 거래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고, 따뜻한 온기를 나눌 공동체가 있다. 억지로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으로 꾸미지 않아도 되니까, 퇴근 후 유흥비로 많은 돈을 탕진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느끼는 고립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돈을 주고 비인간동물의 온기를 느낄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런 것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가두지 않고도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많은 돈을 주고 특이하고 경이로운 전시동물을 보러 갈 필요가 없다. 인간들이 해치지 않은 원시 자연은 이미 그대로 아름답다. 



 이런 세계에 대한 상상은 하나마나 한 망상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우리가 현재 돈으로 사야만 얻을 수 있는 돌봄이 원래는 돈으로 사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사회에서 ‘돌봄’이라는 가치는 무한정 손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돌봄’이라고 칭해지지 않는 돌봄을 수행하는 성노동자, 비인간동물, 자연, 청소노동자 등. 일일이 호명할 수 없는 만큼의 이들은 안전하지 못하고,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침략당하거나 착취당하고 죽어나가고 있다.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안전하지 못하게 만들고, 서서히 죽여가면서 얻으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까지 이것은 아름답게 포장될 수 있을까? 지금 사회는, 성노동자가. 비인간동물이. 자연이,‘그들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거나 혹은 ‘그것은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돌봄이 아니다’ 라는 이유로 이들이 수행해온 돌봄 노동(혹은 착취)을 애써 보지 못한 척 삭제시키고 논의를 유예시키며 점점 더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돌봄이 가진 본래의 가치, 상호간에 돌보고 돌봄받을 수 있으며, 서로의 연약함, 걱정, 곤경, 지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지치는 일이되 그래서 더욱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일이게 되는 것. 우리는 ‘돌봄’을 돈으로 거래하면서 이런 것들을 잊어가고 있다. 

다음달에는 이러한 가시화되지 못한 ‘돌봄‘ 논의에서 내쫓겨진 존재들이 자본의 필요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거나 제도의 영향으로 업장을 잃었을 때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쓴이: 달연

이것저것 해방운동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에 확신이 없어 자기소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밴드 낯선무화과와 타투 작업을 겸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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