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으로 개발된 지금의 도시 환경에서 벌레가 많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왠지 당연한 것 같다.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벌레의 서식지라고 하면 숲과 산과 논과 밭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실제로 벌레는 어느 기후 환경에서도 잘 산다. 위에서 말한 녹지는 물론 물, 사막, 고원, 동굴, 바다, 심지어 극지방에서도 사는 개체들이 있다.
충분한 녹지도 영양가 풍부한 토양도 없는 플라스틱 덩어리의 도시에서 벌레를 볼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벌레가 주로 먹는 것들은 식물 또는 먹이사슬이 자신보다 낮은 벌레이기 때문이다. (벌레마다 즐겨 먹는 기호 식물도 각기 다르다고 한다.) 물론 바퀴와 모기처럼 인간이 사는 데 최적화된 환경에서 인간과 끈질기게 공생할 수 있는 생명력 강한 슈퍼 벌레 – 가주성 곤충이라고 한다. – 들도 예외적으로 있지만, 인간 레이더에 들어오는 벌레들은 잡히면 죽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도시 환경에 밀려났더라도 벌레들은 부피도 질량도 모든 게 작아서 살아갈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번식력도 강해서 어딘가 자연의 공간에서는 수많은 계속 생성되고 살아갈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도 하다.
문제는 인간들의 영역이 심각할 정도로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다. 인구가 몇억 단위로 빠르게 늘고 있기는 하다만, 별개로 눈앞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생태계를 마구 도려내버리고 탄생시키는 사치 공간이 너무 많다. 당장 한국만 해도 이미 헤집어진 가리왕산과 강정마을, 현재 한참 뜨거운 감자인 설악산 등이 바로 떠오르면서 숨이 턱 막혀온다. 기후위기(기후 ‘변화’라고들 한다. 사실 변화라는 단어는 단순히 기후가 바뀌고만 있는 거고, 별거 아니고 우리에게 앞으로 큰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처럼 느껴져서 사실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기후위기’라는 단어가 더 보편화되었으면 한다.)도 어김없이 곤충 개체수에 위협을 가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벌레는 기온과 습도에 매우 민감해서, 미세한 기온 상승만으로도 벌레에게 큰 영향이 미칠 수 있다. 서식지를 뺏기고 먹을 게 없어 사람 사는 곳으로 점점 내려온 멧돼지, 박쥐들처럼 벌레들도 서식지를 잃고, 아예 멸종되고 있다. 이제는 발견되기도 전에 멸종되는 곤충 종들이 더 늘어날 거라고 한다.
꿀벌이 멸종되면 인간도 멸종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아마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꿀벌만이 아니라 모든 벌레에 해당한다. 먹이사슬 최하단에 있는 벌레가 사라지면 벌레를 먹고 사는 윗단의 척추동물들도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 벌레는 식물의 수분(受粉)을 90% 정도 담당하고 있다. 인간이 먹는 농작물을 번식시키고 자라게 하는 데에도 가장 큰 기여를 하는데, 작물의 수분을 담당하는 생물체가 소멸하면 인간 먹을 식량을 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더불어 작물을 먹고 사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살충제를 농작물에 마구잡이로 광범위하게 살포하는 것도 생물 다양성 파괴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런데 해충은 누가 어떤 권리로 정하는가? 왜 꿀벌은 살려야 하고, 모기는 죽여야 하는가? 인간에게 해롭다고 판단되는 벌레를 해충이라 부르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해충”이라는 것이 인간이 아닌 모든 생물, 생태계와 지구 환경에도 적용되는 걸까? 비건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인간에게” 유익하거나 해로운 벌레 – 해충과 익충이라는 개념, 그리고 척추동물과 동일한 <동물> 범주에 속하는 벌레에게는 동물권이 주어지지 않는지 등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이어서>
참고 및 읽어볼 만한 자료들. 재미있으니 읽어보길 추천한다!
<기후변화가 곤충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국내외 연구 분석_박해철>
철종
임금님 아닙니다. “철종”이라는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음. 벌레 공포증이 있는 비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