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형성] 기억의 끝에서, 그녀는 만들어지고 있다

존재를 묻는 언어들

by 파도



인간은 기억을 통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일까.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자신일 것이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말들,
그 말을 가능하게 만든
경험의 기억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있다’고 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어쩌면
살아낸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붙잡고 있는 기억.

그 둘이 겹치는 자리에서
비로소 한 사람의 존재가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리를 공부하며
상담사의 길을 걷기 위해 시작한 교육분석은
처음에는 단순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분석은 어느새
두 해를 넘어섰고,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이 안다고 믿어왔던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분석 장면과 일상 사이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반응들,
그 안에는
익숙하지 않은 모습들이 있었다.

분명 자신이었지만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정신분석이란
바로 그 낯선 자신을 탐구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한 그 모습들은
그녀를 충분히 흔들어 놓았다.

그녀가 자신이라고 믿어왔던 모습이
과연 전부일까,
아니면
지금 드러나는 이 낯선 감각들 또한
자신의 일부일까.


혼란은 길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관찰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고
머무르는 쪽을 선택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멈추는 법을 배웠고,
모르겠다는 상태를 견디는 법을 배웠다.

쉽게 정의되지 않는 자신을
재촉하지 않는 법도.


그 시간들은
불안이었고, 두려움이었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분석가와의 신뢰,
그리고 인간에 대해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아주 작은 이해 덕분이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흐릿했던
존재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기보다는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구조가 생겼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지금 그녀는
조금 더 단단해진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기억의 끝에서,
그녀는 아직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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