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투성이 여행자
몰타의 한낮은 몹시 더웠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오후가 되면 숙소로 돌아가 낮잠을 잤다. 온 몸을 태워버릴 것 같던 해가 조금 수그러들면 먹이를 찾는 길고양이처럼 다시 골목을 살금살금 걸었다. 신기했다. 숙소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열 보만 걸으면 바다가 보였다. 바다 옆 큰길을 따라 걸으면 한 쪽은 시내였고, 다른 쪽은 바다였다.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걷다 보면 항상 길 끝엔 바다가 나왔다. 몰타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그랬다. 몰타는 제주도 면적의 1/6 밖에 되지않는 아주 작은 섬나라이기 때문이다.
골목을 돌다가 마주한 바다에는 보랏빛 노을이 져 있었다.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야 하루 동안의 임무를 마친 태양이 내일의 만남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위로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신비롭고 낭만적인 색이 만들어졌다. 바닷물이 따뜻한 지 사람들은 밤에도 수영을 했다. 비키니 차림의 여인들은 평평한 물 밖에 커다란 수건을 깔고 나란히 누웠다가, 앉아서 웃다가, 다시 물에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유럽인들은 수영을 참 좋아하는 구나.
꽤 오랜 시간을 걸은 탓에 바다에 뛰어들고 싶을 만큼 온 몸이 끈적였지만 1퍼센트의 용기가 부족했다. 수영복과 수영용품을(수건과 튜브) 챙기지 않은 것은 적절한 핑계였다. 해변 난간에 기대어 노을과 수영하는 여인들을 번갈아 보다가 뒤를 돌았을 때, 그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청 반바지에 흰 티, 검은색 긴 생머리를 한 여자. 그녀는 벤치에 앉아 젤라또를 먹고 있었다. 분명 한국인이다. 말을 걸까 말까. 소심하게 흘끗 거리다가 용기를 냈다. “저기, 혹시 한국인이세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의 쌍꺼풀진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몰타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었다. 보랏빛 노을을 앞에 두고, 어둠이 내려 건물들이 빛을 뿜어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교 3학년인 그녀는 밀라노에서 6개월간 교환학생으로 있었다고 했다. 학기가 끝나 짬을 내 몰타에 여행을 온 거였다. 몰타에는 어제 도착했고 오늘 낮엔 바다에서 수영을 했으며 내일 로마로 간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기기 전 로마에서 가족들을 만나 함께 여행을 한다고. “가족들과 여행한다니 부럽다.”고 했더니 “가족들이랑 같이 오시면 되죠~”라는 말이 돌아왔다. 맞다. 그러면 된다. 그 쉬운걸 어렵게 생각했구나 내가.
그녀는 밀라노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는 동안 유럽여행을 많이 했다고 한다. 다만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처지라 돈을 아껴야 했다. 항공권 검색 사이트를 이용해 갈 곳과 날짜를 정하지 않고 ‘everywhere’를 선택한 다음 가장 싼 날짜에, 가장 싼 곳에 가는 것이다. 어느 나라는 2만원에도 가고, 또 다른 나라는 3만원에도 가고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숙박은 주로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조금 가난한 여행일지라도 청춘이라서 가능한, 평생 기억에 남을 여행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몰타에 온 이유로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오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몰타만 따로 오게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리조트만 있는 휴양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놀랍다고도 했다. 그리고 나에게 왜 몰타에 오게 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게으른 나라라고 해서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물론 내 성격상 아무것도 안할 리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꼭 몰타에 다시 오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진심이었다.
2박3일의 짧은 몰타 여행에 꽤 만족한 듯 했다. 그녀가 몰타에서 한 것이라곤 오전에 수영을 한 것 뿐이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남들이 안 가는 곳을 가 본’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반면, 이곳에 온 이유가 ‘아무것도 안해도 될것 같아서’ 였던 나는 목적 달성에 실패할 것이 뻔했다. 막상 도착하고 나니 하고싶은것이 너무 많아서다. 4박 5일은 너무 짧다. 꼭 다시 와서 못 본 것, 못한 것들을 하고 말리라. 결국 ‘아무것도 안하는’ 상태까지 되려면 최소한 몇 달은 있어야 겠다.
한국에 돌아가면 4학년으로 복학하니 취업하고 적응하려면 당분간은 여행을 못 할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휴가를 일주일이나 쓸 수 있냐며 꽤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휴가도 맘껏 못 쓰는 사회 초년생으로 보였나. ‘언니는 직장생활 십년차가 넘어. 당연히 1, 2년차와는 다르겠지’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꼰대라고 할까봐. 입으로는 “뭐 입사 1, 2년차라도 휴가 길게 쓸 수 있는 좋은 회사도 당연히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했다.
헤어지기 전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이남경. 특이한 이름이었다. “어머, 한 번 들으면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이네요.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때 그 몰타!’ 하고 인사 나눠요.” 하고 답해주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파닥파닥 뛰는 물고기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청춘이어서 참 좋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지금이 스스로가 가장 빛나는 찬란한 순간임을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