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녕로그 Mar 07. 2021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가지 못한 소도시, 쿠엥카가 준 경험

장기 여행은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인에 의해 계획이 바뀔 때가 있다. 미리 짜 놓은 계획이 모두 지켜지면 좋겠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여행을 갈 때 계획을 짜는 타입이라면,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다.


아침잠이 별로 없는 모녀의 시차적응이 덜 된 아침, 우리는 부지런히 일찍 길을 나섰다. 너무 일찍 나온 탓인지 오전에 가려던 미술관 여는 시간까지 한참 남아 아침식사를 하고 레티로 공원 산책까지 하고 왔다. 넓디넓은 규모에 나무가 울창한 공원에서 조깅하는 사람들. 조깅을 좋아하진 않지만 여기라면 왠지 나도 뛸 수 있을 것 같은 공원이었다. 한국의 공원보다 몇 배의 피톤치드를 내뿜을 것 같은 공원. 여유로이 구경하고 돌아와 미술관까지 왔는데, 아직이다.


레티로 공원 by. @0seee_photo


사실 오늘 주목적은 공원도, 미술관도 아니다. 톨레도에 이은 새로운 마드리드의 근교지 방문이 목적이었다. 바로, 쿠엥카라는 도시 말이다. 작지만 특이한 매력이 끌어들이는 곳, 쿠엥카. 엄마도 묘한 매력에 끌렸던 걸까? 여행 이동 계획을 나에게 맡겨 대부분 혼자 구상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취향이 궁금해  떠나기 전 마드리드 근교 가고 싶은 곳 없냐고 물어보았다. 한참을 보더니 쿠엥카가 궁금하단다.


실은 교통편 때문에 잠시 마음을 접고 있었지만 나 역시도 가장 궁금했던 곳이었다.


쿠엥카는 일반적으로 지도에 검색하면 마드리드에서 3시간 걸리는 곳으로 나온다. 편도로. 편도 3시간이 근교라고? 왕복 6시간?! 믿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쿠엥카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중, 엄마의 말을 듣고 남았던 미련을 내려놓지 못해 한참의 검색 끝에 빨리 가는 방법을 찾았다. 우리는 쿠엥카행을 결정했고, 그게 바로 오늘이다. 오전부터 여유로우면서 알차게 일정을 보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Atocha역으로 향했다. 우리의 미래는 예상치도 못한 채, 톨레도에 이어 쿠엥카는 또 어떤 매력을 보여줄까 궁금함을 가득 안고.


아토차 기차역 by. @0seee_photo


INFO.

쿠엥카 구시가지에 있는 역은 REGIONAL이 다니는 곳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호와 같은 열차가 다닌다. 구글맵에 마드리드-쿠엥카를 검색하면 이 곳이 도착점으로 나오며, 그러면 편도로 3시간이 소요된다. 쿠엥카 외곽지역에 Estacion de Cuenca-Fernando Zobel역이 있는데, 여기는 AVE, AVANT 고속열차들이 다니는 곳으로, 마드리드에서 1시간이면 도착한다. 매 시 10분마다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로 이동해야 하지만, 20분도 채 걸리지 않기 때문에 쿠엥카를 당일치기 여행으로 고려하고 있다면, 이 방법을 추천한다.


마드리드 - 쿠엥카 Google Map (Ave/Avant 루트)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국제선이 다니는 넓디넓은 기차역. 기차표를 사는 곳은 어찌나 많은지.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였던 표 파는 부스에 들어가 대기표를 뽑았다. 이게 웬일, 대기가 생각보다 상당히 길었다. 갈길도 먼데 가기 전부터 대기가 한참. 엄마가 모르면 빨리 물어보라고 재촉한다.


아니나 다를까 가운데 서있는 키 큰 안내원이 내가 다가서자 먼저 묻는다.

“Where do you want to go?”

“Cuenca.”

“Cuenca? Cuenca?”

“Si.”


혹시나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히 두 번 확인하더니 알아 들었나 보다. 아직도 아토차역에 대해 의문이 가득하지만, 렌페라고 적혀있다고 모두 같은 티켓을 판매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안내원은 여기가 아니라며 나에게 친절히 길을 설명해주었다. 많은 인파에 복잡한 역사에 정신이 나가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 엄마를 책임지고 잘 데리고 가야 했기에 천천히 알려주었던 길을 곱씹으며 찾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마치 춘절을 맞이한 중국의 풍경을 연상시켰다.


상황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로 붐비는 매표소. 놀라도 챙길 건 챙겨야 하니 번호표부터 뽑았다. 더 황당한 건 받은 대기번호. 전광판은 800번대를 가리키고 있는데 나는 택도 없는 번호를 받았다. 999를 지나 1로 돌아오고도 한참인 말도 안 되는 번호로.


멍했다. 순서 기다리다가 하루가 다 갈 것 같았다. 심지어 표를 구할 수 있는지 확신도 없는 채로. 그 와중에 방황하고 있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번호표를 건넸다. 내가 들고 있는 번호표를 가리키며 내 번호보다 더 앞이라며 이거나 가져가란다. 뜬금없는 친절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사실 그래 봤자 택도 없는 번호니 그냥 없는 번호 취급해도 상관없을 정도다. 한 구석에 있는 쉬고 있는 직원을 찾아가 물었지만, 스페인어밖에 할 줄 모른단다. 스페인어로 물었지만, 대답할 마음이 없는지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알 수 없는 줄의 등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체불명의 긴 줄에 서고 기다림의 끝에 표를 파는 직원을 비교적 일찍 만날 수 있었다.


쿠엥카 표 살 수 있는 곳. 사람이 너무 많아 내부는 찍지 못하고 그나마 생긴 줄 따라 줄 서서 밖에서 급하게 남겼던 사진이다. by. @0seee_photo

결론은, 이날의 쿠엥카를 가는 기차는 이미 매진. 쿠엥카는 소도시니까 가는 차편이 여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나의 큰 착각. 쿠엥카행 열차는 바르셀로나가 최종 도착점으로, 이용률이 굉장히 높은 열차였던 것이다. 오전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매진인, 미리 예매가 필수인 열차. 다음 날이나 갈 수 있다는 말에 포기하고 돌아섰다.


이제 뭐 하지? 평소 계획이 틀어졌을 때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인 나는 그냥 생각이 멈췄다. 그간 자차를 주로 타고 다니는 여행을 했던 만큼 여행 계획을 시행하기 이전 이동 과정에서부터 부딪힌 적은 없어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어쩐담. 가지 못한다는데. 누굴 탓할 수도 없고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우리 어디 가지?"

"마드리드 안 간 곳 가면 되지."

잘 몰라서 다 나에게 맡겨도 엄마는 엄마다. 침착한 엄마의 한마디로 왠지 모를 안도와 위로가 되었다. 마음을 다잡으며 일정을 다시 세우러 역사 내 카페에 잠시 자리를 잡았다.


사실 여행 출발 전, 유럽 장기 여행 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마드리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보통 장기로 가면 코스를 궁금해하다 보니 IN/OUT을 말하다 보면 그곳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오가는 것 같다. 그때마다 하나같이 하는 말이 마드리드는 볼 게 없다는 것. 모두가 그렇게 말을 하니 나는 보지도 않고 편견이 생겨 버렸다. 그래서 쿠엥카행이 무산되었을 때 더 막막했다.  


생각과 달리 갈만한 곳은 많았다. 마요르 광장을 시작으로, 산미구엘 시장, 마트를 지나 그랑비아 거리까지 미술관 보느라 지나쳤던 마드리드의 다른 모습을 더 보았다. 아이쇼핑을 하며 그랑비아 거리를 누비며 갑자기 생긴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마무리로 휴식을 위해 맥도날드까지. 이것저것 주문한 음식을 들고 밖을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그러게.”


별 거 아니지만 지나가는 사람만 보아도 그마저 재밌었다.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아까의 속상함은 잊었다. 못 보고 갈뻔한 마드리드의 모습을 보았다는 게 좋았다.


누군가에게는 별일이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날의 경험 덕에 이후로 여행이 틀어져도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재밌고 즐거운 하나의 에피소드를 남길 뿐. 인생의 교훈을 하나 또 얻어간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