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처음 간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몇 가지 유럽의 모습이 있다. 대자연이라던가, 중세 느낌이 가득한 도시와 같은. 톨레도는 그중 중세풍을 가장 처음 마주했던 도시다. 모든 풍경이 중세도시 그 자체로, 가장 머릿속에 그리던 ‘중세시대’의 모습에 가까웠다.
본격 여행 이틀 차,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톨레도 버스가 출발하는 Plaza de Eliptica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버스로 달리기를 50분,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톨레도는 완전히 다른 곳에 온듯했다. 과거의 유럽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만, 절대 촌스럽지도 낡아 보이지도 않는다. 예스러운 모습이 고고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구시가지에 올라서자마자 드러냈던 풍경부터 뭔가 달랐다. 언덕 밑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야와 낮은 건물들. 갈길이 바빠도 담을 건 담아야지. 엄마와 나는 동시에 카메라를 들었다. 이런 게 바로 우리가 원하고 바라 왔던 상상 속 유럽이었다. 마드리드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에 놀라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둘러보기 바빴다. 따스한 웜톤의 벽에 앤티크 한 간판들, 그리고 창 밖의 화사한 꽃까지. 그 조합은 어떻게 표현을 못하겠다. 그냥 ‘중세’라는 단어가 모든 걸 표현해준다. 거기에 스페인 특유의 강렬한 햇빛을 막아줄 천막까지. 천천히 걸으며 모든 걸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을의 첫인상이 너무나도 좋았다.
톨레도 골목길
중세시대 스페인 수도의 엄청난 스케일, 톨레도 대성당.
예상치 못한 풍경에 이곳저곳 사진을 찍는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던 곳이 있다. 바로,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으로, 표를 사는 줄이 워낙 길어 오래 걸린다는 말에, 누구보다도 일찍 가려고 서두르는 중이었는데 잠시 잊었다. 오픈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역시나 이미 발 빠르게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그래도 다행히 우리도 아침 일찍 부지런하게 와서 그런지 표를 금방 구매할 수 있었다.
“우와......”
들어가자마자 우린 고개를 들고 멍하니 감탄만 했다. 이것이 옛 수도의 스케일인가. 스페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당이라더니, 명성에 걸맞은 웅장함. 아직도 성당 내부에 첫 발을 디디던 순간이 눈에 선하다. 건축이 이렇게 지어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프랑스 고딕 양식 특유의 천장이 높은 건축 형태가 나를 압도하는 듯했다. 엄청난 층고에 높디높은 제단화. 그리고 작은 디테일 하나 놓치지 않는 섬세한 기둥의 조각들과 천정화.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은 정말 넓었다. 몇 시간을 둘러보았지만 다 봤다고 자신할 수 없을 만큼. 심지어는 미사가 진행되는 날 방문해서 모든 곳을 보지도 못했는데도.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서양미술사를 깊이 있게 공부한 이후 성당 방문은 처음이라 배웠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니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내판을 따라 구석구석 둘러보는데 끝이 보이지 않으니 몸이 슬슬 지쳐갔다. 미술관 많이 다녀보는 사람들은 알 거다. 단순히 오래 걷는 것보다 미술관에서 작품 몇 시간 보는 게 다리가 더 아프다는 걸. 딱 그 느낌이다. 전날도 거대한 미술관을 두 곳이나 다녀온 엄마와 나의 다리는 지칠 대로 지쳤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볼 수 있는 방은 다 돌아봐야지. 장기 여행 중 아직 초반인데 벌써 다니다가 지친 기색을 보이면 안 된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에 정신 차리고 둘러봤다. 보이는 표지판은 다 따라 들어갔다. 미로처럼 이어진 방을 돌아다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했다. 유난히 많이 서 있는 걸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유명한 게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나의 시선이 도착한 곳에는, 엘 그레코의 작품이 있었다. 톨레도가 엘 그레코의 도시라더니 여기에도 그의 흔적이 있다. 강렬한 원색에 위아래로 길게 늘어진 비율의 인체. 유독 눈에 띄는 옷의 하이라이트. 멀찍이 떨어져서 보아도 자기주장이 강하다.
톨레도 대성당 내 엘 그레코 작품
엄마에게 구구절절 그의 작품의 특징에 대해 알려주었다. 엘 그레코의 도시에 온 만큼 이후 일정에도 엘 그레코 작품을 볼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점점 예술을 알아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뿌듯한 마음을 안고 마지막으로 톨레도 대성당에만 유일하게 있다는 웃는 성모 마리아 조각까지 보고 나왔다.
마을을 눈에 담을 수 있는 한적한 전망대, 제수이트 성당
성당을 나와 봐도 봐도 매력 있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며 어딘지도 모를 집 앞의 꽃이 예쁘다고 사진까지 찍으며 걷던 와중, 하얀 성당인지 교회인지 모를 건축이 나타났다. 계단 위로 보이는 밖에 놓인 안내판을 보니 들어가는 사람은 없지만 뭔가 관광지일 것 같은 느낌. 계획이 있는 듯 없는 듯한 게 우리의 여행 방식. 가던 길을 멈추었다.
"여긴 뭐하는 곳이지?"
구글 맵 평점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고 봤는데 정보가 별로 없다. 심지어 지금도 초록창에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다.
얼마 없는 정보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전경이 좋다는데? 들어가?"
"그래. 시간도 많은데 가보자."
계획이 있는 듯 없는 듯 유한 우리의 여행 방식. 성당에 대한 첫인상이 좋았던 우리는 호기심 하나로 알 수 없는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한 제수이트 성당은 톨레도 대성당과 많이 다른 소박한 규모였다. 톨레도 대성당이 중세를 대표하는 분위기로 고고하고 웅장한 느낌이었다면, 제수이트 성당은 작지만 화려하고, 또 어딘가 모르게 소담한 느낌이 났다. 비슷한 분위기였으면 별로 와 닿지 않았을 텐데 다른 의외의 분위기에 놀랐다. 한눈에 담기는 성당 내부를 뒤로하고 본래 목적인 꼭대기 뷰를 보러 올라갔다. 내부 구경만은 무료인 것과 달리 유료인 옥상 입장. 여기만 돈 받는 거 보니 나름 관광지인 듯하다.
제수이트 성당 내부
2층.. 3층..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 금방 도착했다. 이후에 다녔던 성당의 꼭대기에 비하면 굉장히 낮았던 성당.
옥상은 생각보다 굉장히 좁았다. 10명만 모여도 답답한 느낌이 들 것 같을 만큼. 그래도 뷰는 볼만 하다. 아주 알짜배기! 말로만 듣던 유럽의 주황색 지붕들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좁은 다리 같은 곳에 서서 구경을 해야 하지만, 덜 알려진 곳이라 그런지 좋았다. 한국에서 걸려온 일 전화 삼매경에 빠진 엄마를 보며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는 이걸 안 보고 전화만 하는지 나만 좋은 건가 마음 썼는데, 지금 톨레도에 대해 물으면 여기서 바라보던 뷰를 가장 먼저 이야기한다. TV를 보며 머릿속에 그려온 유럽 풍경을 가장 잘 봤던 곳이라고. 중세풍의 유럽이 눈에 선하단다.
제수이트 성당 꼭대기 뷰
중세시대 여행의 마지막, 산 마르틴 다리
"여기가 맞는 거야?"
이때까지만 해도 늘 사람 많은 관광지를 쫓아다녔던 우리. 톨레도에서 유명한 엘 그레코의 흔적들을 따라 구경을 하고 마드리드로 돌아가기 전, 아쉬운 마음에 다리 하나를 구경하러 나섰다. 톨레도를 오기 전, 구글 맵을 확대 해서 이리저리 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산 마르틴 다리. 우리가 다녀온 관광지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지만, 톨레도 구시가지는 워낙 작아 다녀오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 고민 없이 떠났다. 그런데 가는 길은 모든 게 의심될 정도로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분명 지도에 안내된 대로 가는데 명소라고 하기에는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혼자였으면 진작 발걸음을 멈추었을지도 모르지만, 곁에 의지가 되는 사람이 있으니 함께 걸었다. 조금의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사람이 없어 좋다며 사진도 찍으며 가는 길. 좁은 골목이 많은 작은 마을에 많은 관광객이 오는 탓에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톨레도만의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온통 주홍빛과 녹색빛으로 가득한 풍경에 잠깐 사막 같기도 했다.
산 마르틴 다리 가는 길
지도가 알려주는 길로 따라갔지만 결과적으로 다리를 걸어보지 못했다. 내려가는 길을 지나쳐온 건지 다리를 위에서 내려다볼 뿐이었다. 온종일 걸은 탓에 다시 길을 찾는 건 포기했지만, 후회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한적한 다리 위. 건너편의 관광버스들과 다리를 건너오는 관광객들을 보니 아마 투어로 오면 거쳐오는 곳인 듯하다. 흘러가는 강과 다리, 그리고 반대편 언덕 위의 마을들. 다리로 갔으면 한눈에 담지 못했을 풍경을 보았기 때문에. 톨레도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의 마지막 퍼즐을 맞춘 것 같았다.
산 마르틴 다리
자유여행이라는 이유로 여건 상 세고비아와 톨레도 중 고민하다 오게 된 톨레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풍경에 제대로 시간 여행했다. 스페인의 옛 수도, 중세시대 스페인의 일상은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