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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Feb 03. 2021

영어만 하면 될 줄 알았다

마드리드와 톨레도에서 일어난 일

학교 앞 화장품 가게는 중국인 상대로 영업한다. 그래서 직원이 90퍼센트 이상이 중국인이다. 그리고 매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한국어가 서툴러도 이해해주세요.'


이건 모두 해당 점주들의 전략이다. 중국인이 많이 오고, 대량 구매를 한다는 이유에서 나온 전략. 대한민국 땅인 것도, 수많은 한국 학생이 오가는 대학가인 것도 상관없다. 돈이 되는 사람이 중요하니까.


이런 광경이 익숙했던 나는, 관광이 주 산업인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영어를 최소한이라도 구사할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구시가지에서는. 연간 여행객이 많은 유럽의 관광지 판매 대상은 내국인보다는 외국인 비중이 클 테니까. 어쩌면 내가 여행을 쉽게 고려해 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이 영어를 한다는 건.


그리고 그건 나의 아주 큰 착각이었다.



본격적 여행 시작, 아침 먹으러 간 곳에서 생긴 일.

스페인 유명 프랜차이즈 RODILLA. 첫 아침식사 장소.

"¿Caliente? (따뜻한 거?)"

인사말 Hola 다음으로 처음 들었던 스페인어다.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채 아침 일찍 채비를 하고 나온 우린 아침식사를 하러 솔 광장에서 문이 열린 곳을 향해 갔다. 그렇게 들어간 곳은 스페인 전역에 있는 유명 프랜차이즈 샌드위치 가게였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 의도치 않게 스페인어를 원 없이 말하게 되었다.


주문하기 위해 앞에 선 나를 직원이 바라본다. 찬 공기가 무색하게 강렬했던 스페인의 햇빛과는 너무나도 다른 냉랭한 얼굴로.

보통 음식은 “이거 하나, 이거 하나요.”라고 하면 끝난다. 영어실력과는 무관한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걱정할 게 없다. 주저할 거 없이 말을 꺼냈다.


생각했던 거와 달리, 직원과 소통해야 할 게 많았다. 우리가 주문한 건 스페인식 아침 스타일로, 오렌지주스, 빵, 커피 등 나오는 게 다양하다. 선택해야 할 옵션들이 한두 개가 아닌 셈이다. 커피 종류부터 시작해서 데울 것인지 말 것인지, 주스로 마실 것인지 차로 마실 것인지 등등.


빵을 고르자마자 옆에서 스페인어가 훅 치고 들어온다.

바로 Caliente.


사실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다. 휴학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던 기간에 듀오링고를 보며 여러 가지 언어를 공부하다가 스페인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자막 없는 시트콤까지 보면서 단어 공부들을 좀 하고 왔다. 그래도 실력으로 말하자면 왕초보 중 왕초보다. 예상치 못하게 스페인어가 들려와 갑자기 멍해져서 해석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알고 보면 내가 아는 단어인데도.


직원은 그렇게 2번, 3번 같은 말만 물어봤다.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마드리드에서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어떤 가게가 친절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들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간 곳들에서는.


"Si, Si (네, 네)"

휴.

몇 번의 직원의 말에 곱씹어보다 뒤늦게 생각났다.

뿌듯함과 동시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HOT'이 뭐 그렇게 어려운가? 못 알아들으면 영어로 한마디 해줄 법도 한데 절대 하지 않는다.


"Café con leche y zumo de naranja por favor (카페라테랑 오렌지주스 주세요)"


역시 돈을 버는 언어가 어렵지, 쓰는 언어는 쉽다. 스페인에 도착한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스페인어가 입에서 터졌다. 이래서 현지에 살아야 한다는 건가. 아는 단어들을 긁어모아 생존형 대화를 시작했다.


INFO.

‘Café con leche(카페 꼰 레체), ‘Pan (빤)’, ‘Caliente(깔리엔떼)’, ‘Zumo de naranja(수모 데 나랑하)’

간단하게 몇 마디만 기억하면 스페인어를 못하더라도 아침식사를 쉽게 할 수 있다. 스페인 이곳저곳에서 아침식사를 해본 결과, 주로 빵, 주스, 커피가 나온다. 위의 말은 순서대로 ‘카페라테’, ‘빵’, ‘뜨거운’, ‘오렌지주스’를 가리키는 말로, 문장을 굳이 완성하지 않아도 이 단어들만 안다면 웬만하면 쉽게 주문할 수 있다. 숫자는 만국 공용어 바디랭귀지가 있으니까. 스페인어를 전혀 못한다고 두려워하지 말자.

주문한 아침식사. 요거트와 빵 추가까지 열심히 챙겼다.

스페인어를 못해도 어떻게든 주문은 했을 것이다. 손짓 발짓 다 해가며. 방법은 어떻게든 있다. 원하는걸 온전하게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있지만. 다행히도 스페인어를 조금 알고 있어서 당황은 해도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지만, 엄마와 내가 마드리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얘기하는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관광지라고 다르지 않다.

엘 그레코 박물관 (엘 그레코 집)

박물관에서 영문도 모르고 티켓 구매를 당하는 걸 상상해본 적 있는가.


우린 당해봤다.

톨레도의 엘 그레코 박물관에서.


국제학생증 보여주며 할인이 되는지 물었는데, 학생증을 가져가더니 돌아온 건 답이 아닌 티켓 1장이었다.


"우린 돈을 안 냈는데?"

현금으로 금액을 지불하려 했는데 돈은 아직 손에 쥐고 있다. 그런데 티켓을 갑자기 준다. 알고 보니 국제학생증에 들어있는 비상금으로 그들이 결제를 해버린 것. 가격이 얼마든 여기까지 관광 온 거 어차피 구매했겠지만, 그저 물어봤을 뿐인데. 어이가 없었다.


결제도 결제고, 티켓을 한 장만 준 것도 이상했다. 보통 무료여도 입장권은 준다. 그래야 입장할 때 확인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손에 쥐어준 건 표 한 장. 학생이 무료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적혀있는 요금표 때문에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는데 의문만 가득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둘이 같이 서있는데 한 명만 생각했을까. 무료이겠거니 추측으로 끝냈다.

문제의 티켓

사실 우리가 나중에는 한국인들이 카드로 구매하는 것을 보고 카드 사용을 상황에 맞춰하기도 했지만, 여행 초반에는 모두 현금결제를 고집했다. 이중 수수료가 빠져나가는 카드가 손해가 더 크고, 결제 당시에 나가는 게 아닌, 처리기간을 거쳐 며칠 뒤에 돈이 빠져나가는데, 장기여행일수록 돈 관리가 철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철저한 J는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영어로 말을 하니 통하지 않는다.

이미 마드리드에서 한바탕 경험했으니 두렵지도 힘들지도 않다. 짧디 짧은 스페인어 실력으로 말하며 현금을 열심히 들이밀었다.


"Your mother?"

"Yes"


뜬금없지만, 현금으로 결제하고 싶다는 우리가 그들과 되풀이 한 말이다. 왜인지 내 엄마냐고만 묻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한참을 혼란 속에 대화를 하는데 어떤 직원분이 나오셨다. 영수증을 보여주며 어설픈 영어로 '엄마는 돈 내고, 너는 공짜야'라며 들어가란다.


5명이 넘는 직원이 모여있는데 누구 한 명도 말을 못 해준다. 무료라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하루에 수많은 외국인이 오가는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 한마디를 못해준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INFO.

티켓 구매 시 필요한 단어는 몇 개 없다.

‘Adulto(아둘토)’, ‘Estudiante(에스뛰디안떼). 각각 성인과 학생을 가리키는 말이고, 숫자는 마찬가지로 바디랭귀지만 있으면 된다. 덧붙여 하나 더 적자면, ‘Gratis(그라티스)’, 무료라는 의미이다. 웬만하면 영어가 통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 참고해서 사용하자.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다. 프랑스는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자존심이 강해서 영어를 배울 생각을 잘 안 하거나, 할 줄 알아도 안 쓴다는 말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페인도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여행할 때만 해도, 이 경험들이 낯설고 신기했다.


여행을 마치고 언어에 대한 공부를 하다 알게 된 건, 전 세계 인구가 모국어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1위가 중국어(만다린), 그다음이 스페인어라고 한다. 중국 인구가 많아 1위를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스페인어 사용 국가가 상당히 많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굳이 영어를 배울 필요가 많지 않은 것이다.


사실 49일이라는 여행 중에 말이 이렇게까지 안 통했던 것은, 스페인, 그중에서도 마드리드 뿐이었다. 수도라서 그나마 영어가 통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가장 소통이 안되었고, 아마 추측하건대, 90%가 관광산업으로 보이는 작은 도시들에 비해 마드리드가 그렇지 않는다는 점과, 그들의 언어에 대한,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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