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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Jan 20. 2021

산 넘어 산이네

좌충우돌 모녀의 마드리드 입성기

얼마 만의 비행인가.

긴 기다림 끝에 설레는 비행을 할 시간이 다가왔다. 장기간 해외에 머물 예정이니 한국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 순두부찌개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인천에서 마드리드까지 약 13시간. 이 긴 시간을 어떻게 견디나 싶었는데 두 끼 식사에 간식까지 챙겨 먹고 잠만 자니 어느덧 도착이란다. 입국장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우리의 미션은 시작된다. 숙소까지 무사히 찾아가기. 유럽여행을 처음 준비해본 사람들은 모두 알 거다. 여행 준비 관련 글에는 소매치기에 대한 글이 참 많다. 뭐.. 이건 유럽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가 그렇다. 한국이 치안이 안전해서 우리가 낯설 뿐. 처음엔 두려웠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잃어버린다? 아마 그 여행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웃펐던 여행으로. 첫 모녀 여행, 첫 장기여행 등 많은 의미를 담고 출발했던 이 여행의 기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의 첫 숙소는 마드리드의 중심, 솔 광장에 있었다. 공항과 중심지는 당연히 한 번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은 나의 큰 오산.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모두 환승이다. 거의 다 비슷하니 이것저것 따져볼 것도 없이, 무작정 METRO로 향했다.



어서 와, 티켓 구매는 처음이지?


한참을 걸어 도착한 지하철역에서 첫 번째 관문을 만났다. 바로, 티켓 구매. 당연히 영어로 구매가 가능하니 표는 살 수 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한국에서 지하철 표를 구매할 때처럼 목적지 입력하고 인원 입력하고 돈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정보 입력이 더 있었다. 이래서 사전 정보가 중요하다. 마드리드 지하철에 대해서는 T-10권 구입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기에 온갖 추측을 하며 발권했다.


마드리드 지하철 티켓. T-10권


INFO.

T-10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횟수로 세는 티켓이다. 총 10회를 탈 수 있는 표이며, 여러 명이 한 개의 표로 이용할 수도 있다. 몇 명이 사용하던 10회만 그 표로 타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지하철 몇 정거장 씩 걸어가는 일이 많으니, 장기간 마드리드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면, 한 장씩 구매하는 것을 권장한다.


우리가 맞게 표를 끊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뭔가 나왔다. 이게 맞는지 알 방법은 단 하나, 개찰구 통과하기. 사려고 했던 T-10권이 내 손에 쥐어졌으니 당연히 맞을 거라고 생각했고, 아무 생각 없이 먼저 지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작동이 되지 않는다.


엄마와 나는 38선을 사이에 둔 이산가족처럼 갈라져버렸다. 아마 세상 당황스럽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을 거다. 개찰구 앞에서 길을 막고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직원이 엄마에게 다가갔다. 누가 봐도 여행객인 동양 여자 둘이 모두가 이용하는 길을 떡하니 막고 있으니 신경이 거슬렸을게 뻔하다. 직원은 엄마를 데리고 내가 보이지 않는 기계 앞으로 데려갔다.


내 시야에서 사라진 때부터 나의 불안감은 증폭됐다. '과연 타지에서 엄마 혼자 해결할 수 있을까?', '내가 만약 넘어가야 한다면 이 복잡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해결이 될까?' 이어질 시나리오에 대한 갖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 할 수 있어? 뭐래? 혼자 괜찮아?"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기계 너머로 가려진 엄마에게 물었다.

"괜찮아. 해 볼게."

이래서 엄마라는 존재가 대단한 걸까. 이 상황에 덤덤하다.


일은 예상과 달리 금방 해결됐다. 한국이면 챙기지도 않았을 영수증 덕분에 별 소통 없이 가능했다. 공항 통행료는 2인이 지불해야 하는데 1인만 지불했던 것이다.


"나도 이 정도는 알아들어."

어깨가 우뚝 솟은 채로 밝은 미소로 지나오는 엄마를 보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그렇게 우리는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으로 향했다.


INFO.

T-10을 구매할 때 몇 명이 이용하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다소, T-10권을 몇 명이 사용할 예정이냐는 의미로 오인하기 쉽게 적혀있다. 공항 이용을 몇 명이 했냐는 의미로, 개찰구 통과할 인원수를 입력하면 된다. 



티켓 발권의 굴레


마드리드에는 지하철과 렌페가 다닌다. 환승지에서 우리는 지하철에서 렌페로 갈아타야 한다.


그리고 마주한 또 다른 개찰구. 이번엔 또 다른 표가 필요하다. 분명 표를 공항에서 솔 광장까지 구매했는데 또 구매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렌페는 기차고, 우리는 지하철 표를 들고 여기까지 왔으니 한국에서 기차표는 별도로 구매하듯 스페인도 마찬가지인 것. 이때는 몰랐다. 렌페가 기차라는 사실을. 한국에서 분당선, 경의선 등이 있듯 렌페가 그런 존재일 줄 알았다.


이미 너무 먼길을 걸어왔다. 아까 구매한 표로 가려면 2번 환승을 더 해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여행에선 시간도 돈이다. 결국 표를 다시 사기로 했다.


이번엔 또 다른 기계다. 첫 화면부터 다르다. 처음부터 뭘 눌러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표 한 장 구매하는데 옵션들이 뭐 이리 많은지, 바보가 된 기분이다. 같은 버튼을 하염없이 눌렀다가 홈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 반복하며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던 그때, 마침 누군가 왔다.


"몰래 보자."

물어보면 쉽게 끝날 일인데, 가끔 쓸데없이 그럴 때가 있다. 굳이 혼자 해결하고 싶을 때. 이상하게 말을 걸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척하며 곁눈질로 훔쳐본 끝에 발권에 성공했다.


렌페 티켓 발권


INFO.

이건 팁이라고 말하기도 참 뭐한 부분이다. 대한민국은 IT강국. 정보도 많다. 인터넷에 '렌페 티켓 발권하는 법'만 쳐도 아주 자세하게 적힌 글이 쏟아져 나온다. 필자처럼 기계 앞에서 헤매지 말고 스마트폰을 사용할 것. 괜히 들고 다니는 비싼 장식품 아니다.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무거운 캐리어


기다리던 렌페가 들어왔다. 탑승장과 높이가 같은 지하철과 달리 계단을 올라야 하는 기차가 왔다. 무거운 캐리어가 익숙하지 않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아마 열차 탑승이지 않을까 싶다. 입구는 좁고, 계단은 높으며, 내 뒤로 탑승할 사람들은 기다리고, 열차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케틀벨 10kg도 한 손으로 들며 휘청거리던 엄마가 걱정되었다.


"어떡해 어떡해"

아니나 다를까 등 뒤로 쩔쩔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 하나를 계단 한 칸에 걸친 채 올라오지 못하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힘이 났을까, 마음이 급해 엄마랑 캐리어를 같이 건져 올렸다. 수하물 무게 제한만큼 가득 채워온 캐리어가 미운 순간이었다. 걱정은 했지만 더 이상 집에 버려두고 올 짐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다. 가져가고 싶으면 내가 다 지녀야 하느니라.


가끔은 미니멀리스트들이 참 부럽다. 그들의 가방은 장기여행이어도 가벼울 테니까. 우린 맥시멀 리스트에 가까운 모녀다. 여행 시작부터 20kg를 꾹꾹 채워와 캐리어 다루는 기술이 없을 때부터 사서 고생하는 그런 맥시멀 리스트.


지하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까지 쉬운 건 없었다. 기차 몇 계단 올라가는 것도 버거웠는데 이번엔 수많은 계단을 오를 차례다. 어딘가 엘리베이터가 있을 법도 한데 시야가 좁아졌던 탓일까, 보이지 않았다. 어쩌겠나. 이런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없었던 것도 아닌데.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여행, 어떻게 될까?


세상 밖으로 나와 마주한 말로만 듣던 돌바닥. 마드리드의 첫인상은 북적임 그 자체였다. 상상하던 여유롭고 고요한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사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마드리드에서 정말 핫한 시즌이었다. 한국에서도 손흥민 선수 때문에 주목받았던 챔피언스리그 파이널 경기가 마드리드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열정으로 유명한 스페인이 축구와 만나면 어떤 모습일지는 말 안 해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축구에 관심이 없는 우린 이 사실을 알리가 없다. 손흥민이 유럽리그에서 뛴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다. 그런 우리 눈에는 이벤트가 가득 열린 광장에서 미친 듯이 열광하는 사람들과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경찰들로 가득한 난장판이었다.


챔피언스 리그 축제 현장

숙소까지 도보로 2분. 굉장히 가까운 거리지만 당황스러운 풍경에 그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여행 가기 전 테러에 대한 이슈가 상당히 많을 때였고, 그래서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 대한 주의를 많이 받았다. 여기서 어서 벗어날 생각만 가득했다. 시차 적응도 못하고 타지에 대한 경계가 풀리지 않은 긴장된 상태로 산전수전 겪었더니 지쳤다. 숙소 방향을 확인하고 그저 땅바닥만 바라보며 걸었다.


'엄마, 이 여행 괜찮겠지?'

말없이 걸으니 속으로 불쑥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잠깐 후회를 했다. 광장에서 가까웠던 숙소는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넋 놓고 몇 발자국 걸었더니 간판이 보였다. 이래서 중심지에 머무는 것인가? 무사히 왔다는 사실에 그저 행복하고 앞으로의 여행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유럽여행에 첫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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