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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Feb 14. 2024

내가 3만보를 걸은 이유

다시 돌아온 낯선 도시에서, 말라가

원했던 여행 루트를 위해서라면 선택지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주변의 새로운 도시를 선택하는 것보다 갔던 곳에 또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두 번 방문했던 도시, 말라가.


3년 전, 엄마와 함께 여행하면서 스쳐 지나갔던 곳이다. 사실 그때 인상은 그라나다, 세비야 사이의 작은 도시에 불과해 방문 전부터 큰 흥미는 없었고, 그래서인지 실제 여행에서도 바다 외에는 크게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곳에서 행복감에 둘러 쌓인 채 무려 3만보나 걸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1. 화창한 인생 날씨

말라가 버스터미널


분명 알메리아에서도 날씨가 좋다 생각했는데, 진짜 스페인의 날씨를 만났다. 여행 통틀어서 최고의 선명한 날이었다. 구름이 입체적으로 눈에 띄고, 햇빛이 나를 짓누르듯 강렬하게 쏘는 이 느낌. 4월 초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산책 가고 싶어서 안달 난 강아지 마냥 버스에서 기다리다 하차해 급히 짐을 내려두러 호스텔로 달려갔다. 다시 나와도 날씨는 그대로인걸 알면서도, 모든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짐을 끌고 가면서도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만큼 날씨 하나로 나의 기분은 상당히 고조되었다.


말라게타 해변


하늘만 보며 계속 걸었다. 한번 보고 사진 찍고, 감탄하기를 반복하면서. 혼자 여행을 해서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날씨가 우중충해서 힘들었던 건지, 축 처지던 지난날들이 무색할 만큼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



2. 지도 없이 무작정 걷기

숙소를 나와 정했던 목적지는 단 하나, 바닷가. 특정 바다도 아니고 그저 바다. 그래서 방향만 잡고 무작정 걸었다. 느낌 대로 흘러흘러 바다까지 오는 데는 성공. 지도 없이 왔더니 뜬금없는 캠든타운 벽화도 보고, 몰랐던 말라가 바다의 새로운 뷰포인트도 찾았다. 새로운 자극의 연속적으로 나오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바닷가 구경


걷다가 야무지게 챙겨 온 알메리아에서 샀던 도넛까지 벤치에 앉아 먹었다. 이마가 뜨거워지도록 햇빛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있기.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짓까지 하게 만드는 오랜만의 맑은 날씨였나 보다. 목적지 없이 걸으니 나의 무의식이 시키는 다양한 것들을 했다.



3. 추억 찾기

3년 전 아침 먹던 곳

  

돌아가는 길이 두려워질 만큼 멀리 와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는 곳을 찾았다. 엄마와 아침에 말라게타 조형물을 보러 가는 길에 들러 아침식사 했던 곳이었다.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었을까, 간판만 그대로고 내부는 공사판이었다.


무엇이든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유럽에서 하나의 추억조각이 벌써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이상하더라. 동시에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을 찾았단 생각에 신이 나 기억을 더듬으며 시내로 향했다.


3년 전 그 때 숙소


하나를 찾으니 길을 알아서인지 계속 아는 곳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번엔 숙소. 위치도, 시설도, 가격도 모두 좋았기에 계속 우리 사이에서 회자되었던 곳이기에 유독 반가웠다. 비록 내부는 보지 못하지만 대문이라도 엄마에게 카톡했다.


"여기 어딘지 알아?"

"숙소야?"

3년 내내 여행 이야기만 하면 이 숙소를 얘기해서 그런지 대문만 봐도 알아보는 엄마다.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 나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왔던 곳에 다시 오는 맛이 이런 거였구나.


3년 전 그 때 뚜론 가게


내친김에 그 옆 뚜론가게까지 다녀왔다. BTS가 세계 무대 진출했다는 기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Kpop의 인기를 느끼기엔 어려웠던 그 시절부터 BTS 노래가 나와서 유난히도 인상 깊었던 가게. 그때는 비록 여행 초반인데다 짐이 많은 관계로 여행 다니며 먹을 간식 정도만 샀지만, 이번엔 한국에 들고 갈 기념품으로 몇 가지 골랐다.



4.'내가 알던 말라가는 어딨지?'

궁극적으로 종일 걷게 만든 나의 첫 질문이다. 시내 중심에 있다는 호스텔 밖부터 내 기억 속의 말라가는 어떤 한 부분도 찾을 수 없었다. 지난날들의 나의 여행은 수박 겉햝기 식이었구나 싶어 다시 되돌아보게 되더라.


호스텔부터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바다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단순한 풍경 속에서도 꽤나 흥미롭고 새로운 것들을 보았다. 지난 여행에서 봤던 부분은 새발의 피였다. 매력이 10이었다면 그중 1은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충격을 받은 만큼 신선함도 크게 다가왔고, 덕분에 끊임없이 걸었다.


이를 계기로 어떤 도시를 재방문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추억을 되짚어 보는 것도, 놓치고 지나간 것을 보는 것도 재미더라. 여행 가치관에도 변화가 조금 생겼다. 작은 도시면 하루 이틀 둘러보고 갔는데, 이젠 3일 이상을 머물며 구석구석 둘러보는 것으로. 남들이 제안하는 날짜보다 더 머무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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