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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Feb 07. 2024

날이 좋아서 바다를 걸었을 뿐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내리쬐는 햇빛에 선글라스에 절로 손이 가는 날. 이제야 상상 속 스페인 날씨를 만났다.


알메리아 바닷가


슬슬 돌아다니면서 적응도 되어 혼자 구석에서 눈치보던 나는 이제 갔고, 당당하게 내 영혼이 이끄는 대로 다녔다. 사진을 찍고 싶으면 삼각대를 펴 뛰놀고, 모래사장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고,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다 또 길을 걷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이끄는 대로 끌려다녔다.


1시간 정도 걸어 Playa de Zapillo에 도착했다. 목적지였던 건 아니고, 하염없이 이어지던 상가가 잠시 끊김과 동시에 내 발걸음도 이곳에서 멈췄다. 줄어드는 유동인구에 무엇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충분히 걸으며 구경했다 싶어 스스로 여기를 끝으로 생각했다. 마침 식사 때도 되었으니 앞에 있던 식당에 자리 잡았다. 날이 괜찮은 거 같아 야외로.


Restaurante Building 식당


알메리아에서 보기 힘든 영어가 가능한 직원도 있는 곳. Menu del dia (저렴하게 코스요리처럼 먹을 수 있는 스페인 전통 식사.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음료 포함 10-20유로 정도)를 내 취향까지 고려하며 열심히 추천해 준 그 덕에 어렵지 않게 메뉴들을 골라 주문까지 마쳤다.


비바람 부는 영상 캡쳐본


기분 좋게 바깥을 바라보며 음식이 나오기를 바라던 그때, 몇 분 사이에 날씨가 급변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파란 하늘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리 칸막이를 뚫고 들어오는 찬바람 덕에 테이블보는 미친 듯 흩날렸고, 나 역시도 그 쌀쌀함을 온몸으로 맞았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직원들은 비를 막아줄 천막 지붕만 태연하게 설치할 뿐, 이곳에 있는 어떠한 현지인도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실내에 들어가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이상하리만큼.


'그래. 일단 있어보자.'

어릴 적부터 고집도 있고 미련한 편이었던지라, 흔들림은 있더라도 한번 선택한 걸 쉽게 바꾸지 않았다. 융통성이 때론 있어야 하는데, 추위마저도 이런 식으로 이겨내면서까지 버티려 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산다면, 나도 그런 삶을 경험하고 싶다. 후회해도 온몸으로 느껴보고 후회해야지.


Menu del dia (왼쪽부터 수프, 새끼 대구 튀김, 아로스꼰레체)


손은 점점 얼었지만, 따뜻하게 나온 음식들을 최대한 여유롭게 즐기려 했다. 메뉴는 수프, 새끼 대구 튀김, 아로스꼰레체. 완전한 스페인 식. 수프는 이런 날씨에 최적이었고, 새끼 대구 튀김은 조금 충격적인 비주얼이었으나, 맛있었다. (스페인 친구의 설명에 의하면, 스페인의 대표적인 전통 요리라고 한다. 특징은 대구 머리가 꼬리를 물고 있는 모양.) 아로스꼰레체는 번역하자면 쌀과 우유인데, 단맛이 많이 나는 죽 같달까? 시나몬 가루가 위에 올라가 향이 좋았다.


Menu del dia를 시킨 만큼 요리 하나하나를 천천히 먹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추위에 급해졌다. 주어진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지도 못하고 계산까지 곧장 마치곤 자리를 떴다.



그렇게 밖을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깅하고 산책하던 사람들이 놀랍도록 싹 사라져 휑한 길만 남았다. 새로운 풍경이 아닌데 날씨는 또 별로고.


지루한 길을 즐겁게 걷기 위해선 방법이 하나뿐이다. 전화. 그렇게 한참 전화를 하며 생각 없이 걷다보니 또 날이 개었다. 1시간 넘게 식당에 앉아있는 동안은 식당에서 내쫓으려는 듯 매섭게 바람이 불더니, 밖으로 나오니 또다시 내리쬐는 햇살.


익히 듣던 런던의 날씨를 런던에서 못 보고, 날이 좋기로 유명한 스페인에서 봤다. 우기의 유럽은 스페인도 종잡을 수 없는 걸까?


그래도 덕분에 밋밋할 뻔했던 알메리아 바닷가 이야기에 특별한 에피소드를 하나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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