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여행이 계획한 대로 실천이 될까?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계획형인 우리도 여행 전체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기보단 가벼운 스케치 수준으로 대충 어떤 지역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 조사하고 '언제 이렇게 갈 수 있으면 가면 되겠다'라고 구상을 하고 떠났다.
첫 번째 여행지인 마드리드만큼은 그간 여행을 갔던 것처럼 날짜별로 계획을 했다. 한국에서 마드리드로 넘어가는 비행기가 심하게 연착되지만 않으면 변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마드리드에서 갈 수 있는 3대 박물관의 오픈 시간, 관람 소요시간 등을 확인하고, 그 외의 관광지와의 이동시간, 더 나아가 근교지 한 곳에 갈 계획까지. 4박 5일의 일정이지만 비행시간을 고려하면 불과 3일 정도의 시간뿐이었지만, 할 일은 많았고,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 철저하게 이동 루트와 방문 시간을 조사해 기획했다. 이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유럽여행에 온 김에 갈 수 있는 곳은 다 가야겠다는 욕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솔직하게 그동안 인스타그램에서 남들이 방문하여 올렸던 것이 부러웠고, 드디어 나도 간다는 설렘에 사진의 장소는 다 가보고 싶었던 욕심이 넘쳤다. '유럽까지 여행을 또 오려면 적어도 1주일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고, 또 그만큼 돈을 쓸 수 있는 경제력이 필요한데 앞으로 그 기회가 또 언제 나에게 올까? 이런 생각 때문에 더 그랬다.
사실 이런 생각은 여행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본인과 함께 여행 가는 사람이 피곤해질 뿐이다.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이동하는 데에 시간적 제약이 있으니 즐기지는 못하고 피로만 쌓이기 좋고, 더군다나 현지 상황에 따라 실행하지 못하게 되면 그에 대한 좌절감은 굉장히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철저한 계획형 여행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다툼도 없이 기억이 좋게 남는 경우는 여유롭게 흐름 따라다닌 여행이다. 중간에 성향이 바뀐 나도 지나고 보면 여행 초반에 여유를 즐기며 여행하는 것의 행복을 깨달았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행 중반부터 '여행'이라는 것에 질리고 지쳐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49일의 지난 기억이 부정적이었던 감정이 더 많고 좋았던 것은 거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유의 시작은 무작정 걷기
배부르게 점심을 먹은 우린 일단 걷기 시작했다. 하루 여행을 하면서 구시가지의 많은 부분을 보고 더 이상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걷는 것이었다. 점심 먹기 위해 봐 두었던 식당에 가는 길에 만난 강가로 찾아갔다.
히베이라 지구 끝자락, 도우루 강을 따라 걷는 길. 강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동 루이스 1세 다리가 보였다.
"우리 저기 다리 지나서 건너편 가볼까?"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몰랐다. 아는 것이라고는 와이너리가 많은 곳이라는 점. 술에는 관심이 없는 나는 그냥 할 것이 없는 곳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다리도 가까이 보고 반대편 지구의 분위기도 볼 겸 일단 가보기로 했다.
동 루이스 1세 다리 바로 밑에서 본 히베이라 지구
"와~ 거의 절벽 마을이네."
강을 따라 건너 마을만 바라보며 동루이스 1세 다리가 우리와 가까워질 때까지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다리 초입에 다다라서 지금까지 걸어온 히베이라 마을 방향을 바라보니 뒤편으로 엄청난 절벽이 보였다. 건물이 오밀조밀 세워져 있는 게 생활하기엔 불편할지 몰라도 포르토만의 매력이 확연히 보였다.
동 루이스 1세 다리 이용 TIP
동 루이스 1세 다리는 위아래로 모두 통행이 가능하다. 두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차이가 크고, 각각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건너가고 돌아올 때 다른 곳으로 오길 바란다. (건너갈 때 아래로 지나갔다면 돌아올 때는 위로, 반대로 건너갈 때 위로 지나갔다면 돌아올 때는 아래로)
다리 위의 한 남성
"어머 저기 봐봐."
"어디 어디?"
"위에 왜 서 있는 거지? 뛰어내려?"
"에이 설마."
"그럼 미친 거야? 아님 무슨 쇼 하는 거야? 뭐야?"
다리 아래로 건너가고 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유난히 몰린 곳이 있어 쳐다봤다. 청소년으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다리 위에 서 있었다. 하의 수영복만 걸친 채로. 떨어진다고 죽을 정도의 높이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이곳에 서 있는다는 게 말이 되나. 한국에서 이런 사람이 있었으면 벌써 미친 사람 혹은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 경찰에 신고당했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데 여기 분위기는 누구 하나 말리는 것도 없이 구경하는 것 같았다. 구경거리라고 생각 한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뛰어내리는 건가? 아님 저러고 이목을 끌기만 하는 건가? 쳐다보기라도 하면 또 어디서 돈 뜯어가나?' 처음 보는 장면에 제대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빌라 드 가이아에서 본 동 루이스 1세 다리
"그 사람 아직도 있어?"
"저기 있는 거 같은데, 다른 사람이 여기서 돈 받으러 다니는 거 같아. 별걸 다 한다."
"우린 그냥 저쪽으로 걸어가자."
다리를 다 건너고 와서도 궁금함에 다리 위에 있던 남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황을 언뜻 보니 구경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리 위의 남성과 같은 일행이 찾아가 모자에 돈을 요구하는 듯했다. 괜히 붙잡혀서 이런 거에 돈을 주긴 아까우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와, 다리 봐. 멋있네."
반대쪽에선 너무 가까워 제대로 보지 못한 다리를 건너와서야 제대로 보았다. 마을과는 조금 이질적이면서도 어우러지는 다리는, 철제에서 오는 무게감 때문인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증축 당시 흉물로 여겨졌다니. 요즘 트렌드와 맞아서 그런 것일까, 믿기지 않을 만큼 멋있었다.
벤치에 앉아 여유를
빌라 드 가이아
"우리 여기나 앉을까?"
강가를 따라 가이아 지구를 둘러보니 보이는 것은 전부 식당, 카페테리아였다. 그나마 있다면 흑인들이 물건을 파는 모습이었달까. 배는 이미 부르고 이곳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으니 어디 가지도 못하고 그저 걸을 뿐이었다. 그러다 나온 벤치들. 엄마는 벤치에 앉아 시간 보낼 것을 나에게 제안했다.
그리고 이 순간은 나에게 진정한 '여유'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건너편에서 본 히베이라 지구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히베이라 지구. 그곳을 거닐 때는 볼 수 없었던 포르토 구시가지의 진면모를 볼 수 있었다. 통일된 주황색 지붕에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갖고 있는, 절벽 지형을 따라 차례로 세워진 건물들은 그림 같았다. 저 멀리 공사한다고 있는 타워크레인 조차도. 높은 건물로 가득한 서울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아름다움이었다. 강과 절벽마을의 조화. 포르토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었다.
히베이라 지구와 배 한 척
"아... 좋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맞으며 멍하니 바라보는 강가. 특별한 게 없어도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이런 게 바로 여유구나.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온 '여유롭다'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몸만 편하게 쉬는 게 아닌 지친 내면까지 힐링이 되는 느낌. 밤을 새우고 좀비처럼 학교를 걸어가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기계처럼 움직이며 지쳤던 삶을 머나먼 포르토까지 와서야 조금씩 벗어나는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니 닫혀있던 마음의 문도 열리고 생각에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속에 감추고 살던 내면을 술술 내비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간 하루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쉰다면, 그게 여유로운 하루라고 생각을 했다.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정신적으로 어디선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면서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여유'라고 생각했다. 이 가이아 지구에서 도우루 강을 바라보며 보낸 시간 이후로 사람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나는 진정한 '여유'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고, 이후 나의 여행 스타일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많은 것이 아름답다
동 루이스 1세 다리 위의 신식 트램
엄마와 한참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히베이라 지구로 돌아가는 길. 이번에는 동 루이스 1세 다리 위쪽으로 지나갔다. 한참을 바라본 히베이라 지구를 계속 보고 있는 건데도, 다른 각도로 바라보니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다리 위에서 바라 본 히베이라 지구
"이거 여행서적 표지 아냐? 너무 예쁘다."
"위에서 보니까 또 다른 느낌이네. 그렇지?"
유럽까지 DSLR을 챙겨 온 만큼 사진을 많이 찍을 생각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곳곳에 렌즈를 가져다 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던 거 같다.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보이는 두 개의 시가지도 아름다웠지만, 그중에서도 빼곡하게 놓인 히베이라 지구의 모습이 그림 같았다. 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서 휴대폰에 앱을 깔아 서둘러 사진을 보정할 정도로. 셔터를 자꾸 누르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닫혀 있던 마음을 열고 나니 말투를 비롯해 상대,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사실 장기 여행이 아니었다면 이런 시간을 가질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벤치에 앉는다고 해도 잠깐의 육체적 피로를 덜기 위한 목적이었을 테니까. 아직 여행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심리가 수용시켜준 시간. 표면적으로만 갖는 여유가 아닌 내면까지 여유를 갖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 진정한 '여유'는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제는 누군가가 내게 여행을 묻는다면 이런 순간을 회상하며 '여유로운 여행'을 선호한다고 답할 만큼 좋은 경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