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날씨도 우중충한 신트라 여행
끝.
끝은 언제나 특별함을 내포하고 있다. 모두 다른 의미의 특별함이겠지만.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도와주는 키워드 임은 분명하다.
포르투갈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을 포함하고 있는 나라다. 리스본에서 약 40분, 과거에 바다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곳을 지나면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이 단어는 의미가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거의 끝에 위치한 한국에서 반대편 서쪽, 그것도 그 끝에 간다는 거에 머나먼 여정을 온 느낌이었다. 또 대서양을 마주하는 첫 순간이었기에 약간의 설렘도 있었다. 뭐... 바다가 거기서 거기일 수도 있지만 뭐든지 의미가 중요한 법이다. 그냥 설렜다.
아침부터 날씨가 영 별로였지만 미리 정한 일정에 따라 신트라로 가기 위해 호시우 역으로 향했다.
"뭘 파는 데가 여기밖에 없네"
역 근처 유일하게 아침을 살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스타벅스. 타지에서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먹는 걸 반기지 않는 편이지만, 선택지가 더 없었기에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뭐 먹을까?"
"난 먹을 생각이 없어. 너 것만 사."
결국 내가 걱정하던 날이 왔다. 엄마가 아픈 날. 원체 자주 아팠기에 여행 중 한 번쯤은 그럴 거 같긴 했는데 오늘이 날이다. 늘 정말 거짓말 같이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 해지는 걸 알기에 걱정되는 마음보다 이기적이게도 속상한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간단하게 내가 먹을 것만 사고 곧장 티켓을 사러 갔다. 우리의 하루를 책임져줄 교통패스 1 Day 신트라 교통패스를 사러.
신트라 여행 교통편 TIP
리스본에 여행 가면 시내 다닐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교통카드가 있다. 유사하게 생겼지만 용도는 다른, 조금 더 가성비가 있는 1 DAY 교통패스를 호시우 역에서 별도 판매하고 있다. 가격은 15.8유로에 0.5유로 보증금(2019년 기준). 신트라, 호카곶, 카스카이스에서 타고 다닐 모든 버스와 기차 이용료 포함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려했을 때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다.
신트라로 가는 열차는 자주 있는 편. 그래서 우리는 기차 시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역으로 갔다. 그렇게 역에 도착해 여유롭게 티켓 구매 후 미리 사 온 아침을 결국 혼자 먹고 출발지라서 여유롭게 기다리다 안내 전광판에 적힌 내용을 보고 SINTRA라고 적힌 빨간 열차를 탔다.
1) 원색의 외관이 매력적인 궁전, 페냐 성(궁전)
"사람들 쫓아가면 되겠다."
신트라 역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일제히 각자 목적지에 따라 버스를 타러 간다. 그래서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버스정류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다수는 이 페냐 성이 목적지다. 잘 모르고 쫓아가 줄을 섰는데 운이 좋게도 페냐 성 가는 정류장이었다.
신트라 역에서 버스 TIP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버스정류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각 버스마다 정류장 자체가 다르니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버스인지, 방향은 맞는지 확인하고 탑승하길 바란다. 페냐 성에 가기 위해서는 434번, 헤갈레이라 별장은 435번, 카스카이스나 호카곶 갈 때는 403번을 탑승하면 된다.
"이거 들어가는 줄이야?"
생각보다 빠듯한 일정이 될 걸 알았기에 신트라로 일찍 출발했다. 당연히 사람이 없을 줄 알았던 페냐 성에서 눈앞에 펼쳐진 건 엄청나게 늘어져 있는 줄이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내가 전화할게."
이게 진짜 입장 줄인 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맞다. 점점 늘어날 줄에 대비해 엄마를 줄에 세워두고 상황 파악하러 갔다. 역시 이럴 땐 사람이 둘이면 좋다. 한 명은 대기 줄에 서고 한 명은 알아보러 가고.
'Park.. Palace... 공원이랑 궁전? 무슨 차이지?'
티켓 구매창구 앞까지 도달한 나는 이 줄이 입장 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티켓이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원과 궁전이라는 말은 뭔가 뉘앙스가 애매하게 느껴졌지만 가격이나 여러 가지를 따져보았을 때 공원은 야외, 궁전은 공원에 실내 포함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엄마에게 향했다.
"여기 줄이 맞대?"
"응."
"여긴 뭔데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러게. 말이야. 아, 여기 공원이랑 궁전 티켓 따로 파는데 우리는 밖만 보고 가자."
호카곶도 가고 카스카이스도 가려면 궁전까지 다 볼 시간이 없기에 성 외관만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뭣도 모르고 시간 없어 구매한 티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줄이 어마어마했기 때문. 에버랜드 T express 타는 걸 기다리는 것도 이것보단 빠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동안 봐온 궁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페냐 성. 샛노란 외벽과 붉은 외벽의 조화가 마치 레고 성을 보는 듯했다. 풍경의 완성은 하늘인데, 유난히 우중충한 하늘. 원색이 강조되는 성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게 왠지 모르게 조금 다운되는 느낌이었다.
"우리 공원 티켓만 사길 잘했다."
무슨 줄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늘어난 줄이 등장했다. 길게 늘어진 줄을 지나 무작정 걸었다. 알고 보니 궁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줄. 이미 마드리드 왕궁을 한참 보고 와서인지 이 궁전 내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기도 했고, 페냐 성은 밖에만 보고 있어도 좋았기 때문에 공원만 볼 수 있는 티켓을 산 게 너무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흔히 보았던 '성'의 이미지를 딱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기 때문. 어릴 적 성을 그려보라고 했으면 이런 느낌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싶은, 상상 속의 모습 같았다. 서양 동화에서 보던 '성'만의 요소가 가득한 이 궁전을 바라보고 있는 것 자체가 그저 흥미로웠다.
"비 오는 것 같은데?"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두 번 떨어지는 것 같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모두 지붕 밑으로 달려가 피신했다.
"우산도 없는데 어떻게?"
일단은 급히 피신했지만, 아침부터 영 좋지 못한 하늘에 아직까지도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 상태를 보아하니 금방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에 식당 하나도 없어 보이던 페냐 궁전에서 우산은 어떻게 구하며 거기까지는 어떻게 갈 것인가. 오늘의 여행이 갑자기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비가 그쳤나?"
"조금 잠잠해졌네."
"사진 찍고 일단 여기 나갈까?"
예상보다도 빨리 떠나게 된 페냐 궁전. 그래도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는지, 하늘 상태 때문에 감흥이 없었는지 급히 떠나도 큰 미련은 없었다.
다행히 사진을 찍고 궁전을 떠날 때까지 비가 거세게 오지 않아 버스를 타고 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만난 운명의 한 가게. 우산을 사기 위해 주변 가게를 둘러보다 사람들이 우산을 개봉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우산 때문에 간 그 가게에서 밖에 걸려 있는 방수 바람막이가 눈에 띄었다. 각자 들고 다니느라 불편한 우산보다 여행에는 우비가 적합한 것 같아 관심이 갔다. 그렇게 사람들로 붐비는 가게 내부로 들어갔다.
다양한 색깔에 사이즈도 여러 가지로 있던 방수 바람막이. 가격도 한화로 약 15000원으로 합리적이었다. 사자마자 소중한 카메라와 가방을 각자 품에 안고 그 위로 바람막이를 입었다. 각자 속에 품은 물건 때문에 볼록하게 나온 배를 보니 왠지 모르게 우리의 모습이 웃겨서 웃음이 새 나왔다. 비가 오는 게 이렇게 즐거울 수 있나.
이 바람막이는 앞으로 우리의 여행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본래 다음 목적지는 호카 곶이었지만 이왕 신트라까지 온 거 페냐 성도 빨리 보고 왔겠다, 다른 곳 한 군데를 더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원래 탔던 434번 건너편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에서 435번 버스를 타고 헤갈레이라 별장으로 왔다.
비가 오고 우중충한 하늘에 아픈 엄마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 몸이 안 좋은데 날씨도 안 좋으니 여행할 기분이 나지 않았지만 40분 걸려 여기까지 왔으니 마음을 애써 달래 보며 갔다.
2) 흐린 날과 잘 어울리던 별장, 헤갈레이라 별장
헤갈레이라 별장은 한국에서 신트라에 대해 알아볼 때에도 관심이 없던 곳이다. 사진으로 얼핏 보면 평범한 공원처럼 보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역사 속 장소 같이 보이는 게 굳이 거기까지 가야 하나 싶었기 때문에. 고민도 하지 않고 제외 대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사람이 있던 페냐 성과는 다르게 가는 길은 휑했다. 버스 타는 사람부터 많지 않았고 내리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이곳이 맞나 싶었다.
그러나 헤갈레이라 별장은 예상과는 달리 비 오는 날의 풍경이 잘 어울렸다. 뿌옇게 낀 안개가 이곳의 분위기를 더 살려주었다. 으스스한 느낌과 신비로운 느낌이 교차하는 듯했다. 떨떠름한 마음으로 걷고 있던 나에게 조금의 돌아다닐 의지를 안겨주었다.
입장권을 구매하며 받아 든 지도 한 장. 여행만 오면 그렇게 지도가 보기 싫다. 내부에 대한 설명이 담긴 것인데도.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라면 신비로운 깊은 우물이 있다는 것이기에 그나마 목적지가 있다면 그곳이었는데, 지도 보기도 귀찮고 그래서 무작정 걸어 다녔다. 갈림길 표지판을 보면 어딘지 알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게 어딘지도 모른 채로.
왕족들이 머물렀던 곳이라길래 화려하게 꾸며진 곳들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울창한 나무뿐이었다. 사람도 없고 건축물도 딱히 보이지 않으니 뭔가 산 중턱에 올라온 느낌이었다. 다시 갈림길로 돌아가 다른 길로 가보았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얼핏 얼핏 보이는 중세 건축들. 말 그대로 중세시대에 온 느낌이었다. 건물만. 일명 사진빨 잘 받는 건물 같았달까. 우중충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했는지는 다시 가봐야 알겠지만, 그랬다. 건물 조차 축축하게 젖어든 느낌. 그래도 사진을 찍으면서 기분을 좋게 유지하고 싶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요리조리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컨디션 난조로 힘든데도 애써 웃고 있는 엄마를 보며 차마 속상한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하니 함께 좋았던 기억을 이곳에서 남기기 위해선 이것이 최선이었다.
"저 사람들 따라 가볼까?"
한차례 인적을 따라갔다가 허탕 치고 다시 돌아다니다 또 만난 인적을 따라간 곳에서 이 별장의 가장 유명한 곳을 만났다. 통로가 좁아서인지 우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줄을 세워 차례로 안내를 해준다. 과거에 우물이었던 곳으로 그 깊이가 꽤나 되는 곳. 여기가 어떻게 우물이었을까, 어떤 원리가 들어있을까, 아래로 내려가면 어떻게 생겼을까 등등 수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내 몸도 오늘따라 귀찮고 엄마도 아프니 내려가자는 말도 안 나왔다. 그냥 아쉬운 대로 위에서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입구로 나왔다.
"저기 조금 분위기 있는데"
사실 진짜 멋있었는지는 한번 의심해볼 만하다. 이곳에서 별 거 안 한 것 같은데 나온다는 이유로 더 아쉽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애써 출구까지 가는 길 사이에서 멋있어 보이는 이곳저곳에서 풍경사진을 남겨보았다.
"저기서 아까 남은 거 먹으면서 잠깐 쉬고 호카곶으로 갈까?"
나갈 때쯤 보니 성곽이 보이는 곳에 벤치가 있었다. 아침에 먹다 남은 음식으로 점심을 간단히 홀로 때우고 호카곶으로 가기 위해 신트라 역으로 돌아갔다.
-다음 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