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으로 보는 호카곶, 카스카이스
날씨와 컨디션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떠나기 전부터 여행 다닐 때까지 나름 여유롭게 짠 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여행 이후 여행 스타일이 바뀐 지금은 나름 강행군이지 않았나 싶다.
신트라를 반나절 둘러본 후 호카 곶을 가기 위해 신트라 역으로 돌아와 403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참 허허벌판을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저 멀리 조금씩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륙의 끝, 역사적 장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멀리서 보이는 그곳의 풍경은 상상 속의 모습과는 다르게 우중충한 모습에 기대감은 떨어지고 있었다.
수평선을 지나면 추락하는 줄 알았던 그곳, 호카 곶.
'FIM DA EUROPA'
유럽의 끝. 포르투갈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호카 곶에 드디어 도착했다. 풀 숲에 꽂혀 있는 돌에 붙어있는 표지판이 드디어 끝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렸다. 바다 바로 앞까지 걷는 그 길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없는 이들에게 여행 TIP
빠듯하게 신트라, 호카 곶, 카스카이스 3곳을 모두 여행 중이라면, 버스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처럼 어느 여행지든 빠듯하게 여행할 때는 해당되는 이야기로, 버스정류장에서 내릴 때마다 미리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의 배차 시간을 확인하는 게 좋다. 대부분 규칙이 있어서 눈으로 확인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경하다 보면 잊을 수도 있으니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놓자.
정말 아무것도 없이 바다만 있는 대서양. 배, 섬 그 어떤 것도 없고 심지어 하늘에 구름 한점도 없었다. 매서운 바람과 고요한 바다만이 있을 뿐.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상상하며 갖기에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지만, 여긴 또 언제 오겠나 싶어 긍정적인 마음으로 들여다보려 했다. 팔을 벌려 신나게 사진 찍고 애써 텐션을 올려보려 엉덩이까지 씰룩대며 동영상 찍으면서.
"말이 있는데?"
"저게 왜 있어?"
바다 반대편으로는 드넓은 초원이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복장까지 제대로 갖춘 이들의 모습에 무슨 행사가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 말을 탄 이들은 우리를 지나 옆으로 나있는 길로 유유히 사라졌다.
"저기로도 사람들 많이 가는데 가볼까?"
파도에 부서지며 반짝반짝 빛나는 햇빛도 없고 어딘가 밋밋하고 심심했는데, 말에게 시선이 빼앗기며 바라본 곳은 더 멋있는 풍경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쪽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꽤 있었다. 호카 곶임을 표시하는 기념탑 앞에 몰려있는 사람들에 정신 팔려 미쳐 알지 못했다. 안전상의 이유로 있는 것이겠지만, 마침 울타리도 걸리적거렸는데, 울타리 없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곳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와...."
커다란 바위들 드러난 절벽 위에서 아래를 쳐다보니 바위에 부딪히고 있는 파도가 눈에 들어왔다. 길게 늘어진 해안선 전체에 파도가 부딪치며 생기는 하얗고 푸르른 그 빛깔이 너무 아름다웠다. 엄마와 함께 바위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해가 없지만 굳이 챙겨 온 선글라스도 껴보고, 이런저런 대화도 하고, 나름대로 우리만의 낭만은 즐겼다.
"이제 사진 찍고 가자"
모두가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끝 지점에 와 의미부여를 하며 사진을 남기고 싶었을 거다.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바다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사진 찍는 것은 쉽지 않았다. 누군가는 바위에 걸터앉고, 누군가는 신나게 만세하고 있고, 누군가는 그들 앞을 가로막고. 그야말로 눈치싸움의 장. 사람들이 한차례 사라지길 기다린 끝에 사진 몇 장 남기고 버스정류장으로 돌아갔다.
아기자기한 건물과 바다가 매력적인 항구도시, 카스카이스
신트라에서 타고 온 403번 버스를 내렸던 버스정류장에서 그대로 탑승하면 카스카이스까지 간다. 미리 확인하고 온 버스 시간에 맞추어 기다렸다. 차가 밀리는 곳도 아닌 곳에 시간표는 있으나 정시성이 높은 기차와는 다르게 자유분방한 도착시간을 자랑하지만, 어쨌든, 조금 더 기다리면 오긴 한다. 신트라 투어의 마지막 목적지를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에서 내릴 땐 찜찜한 일이 있었다. 그저 휴양지로 관광지로만 생각했는데 어디서 갑자기 학생들이 대거 탑승했다. 평화롭게 앉아서 가고 있던 우리 앞으로 현지 학생들이 빼곡하게 섰다. 포르투갈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자꾸 우리에게 떨어지는 그들의 시선이 찜찜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정류소에 도착해 급하게 내렸는데 내 가방이 내리면서 뭔가 짓누른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릴 때 얼핏 약간의 격양된 하이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내리자마자 떠나는 버스 안을 힐끗 쳐다봤다. 신호에 가로막혀 서 있는 버스 안의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얼핏 내리며 거쳐간 과정을 잠시 떠올려보니 내가 한 사람의 신체부위 어딘가를 직접 만졌다고 오해하고 막 째려보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대화하는 모습과 시선들로 생긴 찝찝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해일지, 내가 예민한 건지는 알 수 없으니 혼자 아주 가벼운 해프닝으로 기억하는 카스카이스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에피소드다. 그들 얼굴이 기억도 안 나고 다시 만날 일도 희박하기 때문에 찝찝함은 금방 잊고 넘어갔다.
온종일 한 끼도 제대로 먹은 게 없어 잠깐 휴식도 취하고 저녁도 먹을 겸 정류장 바로 앞의 커다란 복합 쇼핑몰로 향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을 줄 알았던 것과는 달리 바다도 어딘지 모르겠고. 그냥 뭔가 많아 보이는 쇼핑몰만이 최선의 선택지 같았다. 저 정도 크기면 식당 하나 정도는 있겠지 싶었다.
"사람도 없고 연 곳도 없고 무슨 쇼핑몰이 이래?"
"다 우리나라 같지 않나 봐."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걸까? 그냥 망한 곳일까? 쇼핑몰 내부는 휑했다. 1층에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 종류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그래도 뭔가 있겠지 싶어 한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에서 왠지 모르게 활성화되지 않은 것 같은 푸드코트를 만났다. 많은 유럽인들이 찾는 휴양지라던데 생각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음식 종류는 다양했다. 락사, 피자 등등. 처음 보는 세계적 음식에 메뉴명만 보고 뭔지 모를 것도 많았다. 고민 끝에 함께 먹을 요리를 간단하게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는 새가 와서 저걸 다 먹고 있는데 신경도 안 쓰네.'
몇 층 올라오니 야외에 건물들 뒤편으로 있는 바다가 보여 사진 찍으려 밖으로 나왔다. 야외에서 눈에 띈 건 바다보다 새가 남은 음식물을 테이블 위에서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국에서는 푸드코트면 당연히 개인이 먹고 스스로 치우고, 만약 그게 그 자리에 남아있다면 청소하시는 분이 가져다 치우실 것 같은데 이곳은 어느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근처에서 청소하던 분은 말 그대로 바닥만 청소할 뿐이었다. 그렇게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야외석에는 어느새 테이블에 사람은 없고 새만 남아있었다.
호카곶에서 조금씩 하늘이 파래지는 것 같더니 카스카이스의 하늘은 신트라, 호카곶과 달리 내가 너무 좋아하는 상태의 하늘이 되었다. 파란 하늘에 적당히 구름이 있는 하늘. 여기까지 와서야 이런 하늘을 보니 바다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 상태를 보니 영 아니다. 비가 그치고 내 바람막이까지 껴입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억지로 바다까지 끌고 가기 미안하게 만들었다.
"엄마, 저기 바다 보여. 너무 예쁘다."
힘든 걸 알면서도 카스카이스까지 왔으니 뭐라도 하나 보고 싶었던 철없는 나. 한국을 떠나 여행지에 가면, 하루라도 뭔가 안 하고 보낼 수 없는 초보 장기 여행자였던 나.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카스카이스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기엔 아쉬웠다. 다시 오면 되는 건데. 결국 엄마에게 넌지시 말을 했다. 그땐 엄마가 못 가겠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기서 걸어서 얼마 안 걸리네. 한 5분 정도 거리에 있나 봐."
"그래. 가."
아름다운 바다가 있어 많은 유럽인들이 오는 곳으로 알았던 카스카이스. 나름대로 힘들지 않게 가까운 곳으로 가야겠다며 구글 맵에서 가까운 바다 중 평이 가장 괜찮은 곳을 찾았다. '가까움'으로 밖에 미안함을 합리화하며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로 가는 건가?"
눈앞에 바다가 보이니까 무작정 그 방향으로 직진하면 바다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길은 복잡했다. 돌이켜보면 그 마을의 느낌도 알 수 있었던 기회였는데. 너무 늦지 않게 신트라로 돌아가려 하기도 했고, 바다를 가야겠다는 일념 때문에 제대로 보지도 않고 모두 지나쳤다.
몇 차례 골목 갈래길에 서 고민의 과정을 고천 끝에 바다 근처까지 왔다.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숨은 플레이스를 찾은 듯 굉장히 작은 규모의 바다가 나타났다. 계단 밑으로 내려가면 정말 우리 밖에 없는 세상일 것 같은 작고 인적도 드문 곳.
위에 앉아 사진만 찍다가 가까이 가보기로 했다. 하늘도 맑아진 덕에 바다도 파랗게 보이고, 고요한 것이 너무 좋았다. 아마 이 작은 곳도 몇 달 뒤엔 해수욕을 즐기러 온 이들로 가득 찼을 거다. 사람이 가득한 시기의 카스카이스만의 느낌은 만나지 못했지만 멀리 보이는 요트들로도 충분했다. 부자들이 별장을 놓고 휴양을 즐기는 곳이라는 걸 느끼기에.
'아빠, 할머니 사랑해요'
잔잔한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밀당하다 옆에 날아온 새와 밀당하고 돌아가려는 길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모래사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드넓은 모래사장이 있다면 글자 한번 정도는 새겨줘야 되는 거 아닌가. 애써 다운된 기분과 분위기를 끌어올릴 겸 여행 내내 그리워했던 한국에 있는 남은 가족들을 떠올리며 적었다. 또박또박 적느라 글자도 귀여워진 것이 어릴 적의 나로 돌아간 듯했다.
저녁이 되고 해가 넘어가기 전, 리스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카스카이스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아서 리스본으로 돌아가는 대중교통 방법에 대해 애매한 부분이 많았는데, 다행히 기차역으로 가니 리스본으로 가는 열차가 생각보다 자주 있었다. 기차역과 바다와 거리도 가깝고 생각보다 여행하기 괜찮은 곳이다. 이곳이 종점이라 여유롭게 카스카이스 역에서 시간을 보내다 시간 맞추어 열차를 탑승하고 돌아왔다.
열심히 돌아다닌 신트라 투어는 한국에서 계획 짜며 걱정했던 것보다 순탄했다. 리스본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가는 근교지인만큼 교통 인프라가 잘 되어 있어 바쁘게 여행 다니는 이들에게 최적의 근교지이지 않은가 싶다. 한 번의 경험이 있어 이때만큼의 새로움은 느낄 수 없겠지만, 다음 리스본 여행 때 날씨가 좋은 어느 날 여유를 갖고 다시 가보고 싶은 근교지다. 수박 겉햝기 식으로 본 카스카이스만큼은 특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