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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이 드문 조용한 소도시를 찾아 간 곳

포르투갈 슬로우 여행 끝판왕, 에보라

by 녕로그

"언니, 이거 잘 어울린다. 언니, 이거 15000원. 예뻐."


유럽으로 떠난 그 해 봄, 다낭에 갔었다. 박항서 감독님으로 인해 한국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던 베트남. 그중 국내에서 직항이 운항 중인 다낭은 한국인이 많이 가는 해외여행지 1위를 할 정도로 국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5성급 호텔을 10만 원 초반대로 즐길 수 있을 만큼 물가가 저렴하고 가까우면서도 이색적인 풍경을 가진 여행지인만큼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


베트남인들은 많은 한국 관광객들 덕에 물건을 판매하는데 전혀 어렵지 않을 만큼 한국어를 유창한 수준으로 구사했다.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온통 한국인이었고, 현지인들도 한국어로 얘기를 했다. 어딜 가나 한국어가 들렸다.


그렇게 베트남 다낭은 나의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여행지 리스트에 올랐다. 해외를 온 건지 한국에 있는 건지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여행지는 매력이 전혀 없었다. 덕분에 나의 여행 취향 한 가지를 파악했고, 유럽 여행 계획을 하면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소도시 방문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짰다.


이 여행에서 그런 이유로 여러 소도시를 다녀왔고, 그중 하나가 이 에보라 여행이다. 이곳은 어떤 소도시보다도 개성이 강한 곳이었다.



소도시 중 소도시, 에보라로 가는 방법

리스본에서 버스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에보라. 이곳이 우리의 첫 소도시 중 소도시 목적지였다. 국내 여행객이 많지 않은 관계로 수집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을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곳. 그런 곳이 생각보다 리스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은 곳에 있었고, 가는 방법은 쉬우면서 관광객이 적은 곳이라니. 더 매력적이었다. 어찌 안 가겠는가!


rede expressos 티켓 창구


에보라 가는 법 TIP

Lisboa sete rios역 근처에 있는 rede expressos 티켓 창구에서 버스표를 구매할 수 있다. (rede expressos 티켓 창구까지 가는 길은 sete rios역에서부터 화살표로 안내가 되어 있지만, 조금 헤맬 수도 있다. 헷갈릴 때는 구글 맵에 'lisboa rede expressos'를 검색하면 정확한 위치가 나오니 참고.) 금액은 왕복 성인 기준 11.30유로. 학생 할인이 있어 학생은 9.40유로에 구매할 수 있다 (2019년 기준). 티켓에 적힌 중간쯤에 viatura와 lugar 번호가 적혀있는데, viatura는 버스 번호, lugar는 좌석 번호이다. 탑승하는 곳 표시되는 전광판에서 버스 번호만 보고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좌석 번호에 따라 버스 내 좌석에 앉으면 된다.



평범한 길도 구경거리, 페인트 칠을 하는 현지인

에보라 버스 정류장은 구시가지 밖에 있다. 구시가지 여행하며 보기 힘들었던 쌩쌩 달리는 차들이 있는 도로를 걷다 보면,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보인다. 이 성벽을 통과하면, 하얀색 벽의 건물들로 가득한 골목이 반겨준다. 걸어가는 관광객 한 명도 없고, 오로지 골목만이라는 게 문제지만. 도시에서 유명한 관광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이들이 한 명도 없다는 건 낯설었다. 인적이 너무 드무니 되려 모르는 곳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생기기도 했다. 아마 혼자 있었으면 발걸음을 재촉했을 거다.


페인트칠하는 현지인


"직접 집주인이 칠하나 봐?"

기본적으로 하얀 벽에 알록달록한 개성 있는 문들이 지금까지 봐온 포르투갈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마음에 드는 문을 찍으며 걷던 와중에, 외벽을 칠하고 있는 현지인들을 봤다. 흰색은 때가 쉽게 타서 밖에 드러나 있으면 금방 더러워지기 십상인데 어찌 이리 관리가 잘 되어있을까 궁금했는데, 이유를 알게 되었다. 휴일도 아닌 날에 곳곳에서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현지인들을 보니 그들의 삶이 달리 보였다. 조상들이 남긴 잘 보존된 유산들만 좇던 여행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을 직접 본 거 같아 좋았다.



과거의 죽은 자의 뼈로 이루어진, 뼈 예배당

결정적으로 에보라를 오고 싶었던 이유. 인간의 뼈와 두개골로 내부가 가득 채워진 예배당. 그곳이 궁금했다. 죽은 사람의 유골이 땅 속에 파묻힌 것도 아니고 밖에 그대로 드러나있다니 섬뜩하기도 해서 겁이 많아 살면서 공포 영화 한 편도 보지 못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특별함, 특이함에서 오는 호기심이 공포심을 이겨내고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뼈 예배당 외부


뼈 예배당 입장료 Info.

성인은 5유로, 학생은 3.5유로다. (2019년 기준)


Nós ossos que aqui estamos pelos vossos esperamos.

'이곳에 있는 우리 뼈들은, 그대의 뼈들을 기다린다.'

입장하자마자 보이는 소름 돋치게 하는 문구. 뼈 예배당에 왔다는 게 확 와닿았다. 본격적 공간으로 들어서고 싶게 하는,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문구였다.


뼈 예배당


예배당 내부는 천장과 바닥을 제외한 모든 벽면, 심지어는 중간에 놓여있는 기둥까지 뼈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작은 창문들로 들어오는 내부를 비추는 빛. 흐린 날엔 이곳의 분위기가 한층 섬뜩해지지 않을까 싶다.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 눈에 띄는 해골 옆으로 온갖 뼈들이 있는 게 보이니 익명의 죽은 자의 뼈가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긴 한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봤을 땐 그저 독특한 인테리어의 아름다운 예배당이었다.


한눈에 담길 만큼 작디작은 예배당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다양한 기독교 관련 예술 작품들이 있다. 작은 예배당만큼 이곳의 공간도 작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넓었다. 대부분이 우리에게 익숙한 르네상스기 이후 종교 작품도 아니고, 중세시대 혹은 어떤 또 다른 비주류 시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것들이 많아 기독교가 아닌 우리에게 흥미롭지는 않았다.


알 공예 작품들


"이건 좀 예쁘다."

어떤 내용의 종교화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종교의 힘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종교화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빠르게 지나가면서 구경하고 있었다. 와중에 눈에 들어온 알공예. 섬세한 서양인들 예술작의 끝을 보는 느낌이었다.



"저기는 식당인가 보다."

전시는 야외로 길이 이어진다. 전시 중간에 전경도 포함되어 있는 건지 이동루트가 그렇다. 그곳에서는 에보라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하얀 벽에 주황색 지붕으로 이루어진 에보라 건물들을. 언덕배기로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에보라 구시가지는, 비교적 낮은 지대인 예배당에서 바라보기 좋았다. 바로 아래로 보이는 식당 주변 다니는 사람들, 구름 가득한 하늘, 평범한 건물 사이로 보이는 다른 건물들 구경하며 잠시 박물관 구경하며 떨어진 텐션을 끌어올렸다. 여느 유명 전망대에 비하면 별 볼 일 없겠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고대 로마의 흔적, 에보라 로마 신전

"로마 신전?"

지도를 확대해 에보라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포르투갈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곳이 눈에 띄었다. 언뜻 보이는 사진으로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지만, 로마와 포르투갈 사이의 이질감 때문에 궁금해서 가보았다.


에보라 로마 신전


"저기 있다!"

6월이 들어서며 예쁘게 핀 자카란다를 보며 걷고 있는 와중, 신전이 눈에 띄었다. 평범한 건물들 사이에 있으니 전력질주를 하며 지나가도 알아볼 존재감이었다. 갑자기 다른 세상에서 뚝 떨어진 건물처럼 혼자 동떨어진 분위기의 신전이었다. 있을 것 같지 않은 구시가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신전. 반쯤 무너진 상태로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겨져 있는 것이 이질감을 극대화시켰다.


"이게 다야?"

입구도 뭣도 없었다. 그저 신전의 외관만 남아있을 뿐. 사람 키보다도 훨씬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신전은 무너진 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에보라 로마 신전 부분


"우리 그냥 여기서 사진이나 찍자. 나 저기서 사진 찍어줘."

여기까지 와서 할 수 있는 건 신전 양식 분석과 사진 찍는 것이었다. 신전 양식 분석은 배움을 모두 끌어내도 이 신전의 기둥이 코린트 양식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걸로 끝이었지만. 이 작은 도시에서 로마 신전을 봤다는 기억 자체를 남기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포르투갈의 가장 큰 성당, 에보라 대성당

생각보다도 더 볼 것이 없었던 로마 신전을 보고 잠시 휴식을 위해 앞에 있는 다이아나 정원 벤치에 앉았다. 뼈 예배당 하나만 생각하고 에보라까지 왔지만, 돌아가는 버스 티켓은 늦은 시간으로 구매를 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여유가 흘러넘쳤다. 할 일 없이 여유롭게 앉아 있으니 별 말이 다 나왔다. 이 여행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살아오면서 모녀 사이에서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까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한국과는 상반되는 선명하고 빛이 났고, 더 앉아 있고 싶게 만들었다.


"여기 또 갈만한 곳 있어?"

"글쎄, 구글 맵 한 번 볼까?"

한참 대화를 나누고, 다시 에보라를 구경하기 위해 구글 맵을 켰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에보라 대성당이 있었다. 이미 성당은 미련 없을 만큼 다 봐서 궁금하진 않았지만, 갈 곳도 없으니 그냥 가보았다.


얼추 리스본 대성당과 유사해 보이는 에보라 대성당은, 당연히 작은 도시에 있는 성당인 만큼 그 규모가 훨씬 작을 줄 알았다. 그런데,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성당이란다. 도시의 스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구에 놀랐다. 소도시에 위치한 성당인 만큼 특별한 점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대단한 곳이었다니.


에보라 대성당 내부


그럼에도 사실 엄청난 스케일의 톨레도 대성당을 스페인에서 보고 와 내부를 봤을 때는 감탄이 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톨레도 대성당은 엄청난 층고와 화려함에서 오는 웅장함이 매력이라면, 에보라 대성당은 포르투갈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매력으로, 두 곳은 완전히 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성당은 많이 둘러보았으니 실내는 가볍게 보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에보라 대성당 입장료 Info.

대부분은 성당은 입장료는 없다. 단, 옥상에 올라갈 수 있는 곳은 올라가는 사람에 한해 돈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성당 역시 마찬가지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인당 3.5유로. (2019년 기준)


에보라 대성당 옥상


"여기 특이해!"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좁은 돌계단을 오르고 올라 옥상에 도착했다. 평평하지 않고 살짝 기울어진 옥상의 바닥은 마치 내가 지붕 위를 밟고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옥상 자체의 모습도 특별했고, 옥상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에보라 시내 뷰도 특별했다. 사람으로 붐비지도 않고 그동안 보지도 못한 새로움도 있는 이 대성당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에보라 대성당 회랑


옥상을 여유로이 구경하고 내려와 회랑을 걸었다. 인파에 치여 사람들을 피해 다녔는데, 우리만 있는 이곳이 평화 그 자체였다. 그림 같은 구름이 떠 다니는 새파란 하늘과 아름다운 회랑으로 들어오는 번지는 빛까지 완벽했다.


버스 터미널 가는 길, 구시가지 밖


"이제 갈까? 가서 버스 기다리자."

"그래!"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까지 미련이 없었던 여행은 오랜만이었다. 에보라를 갈 때만 해도 며칠 내내 흐린 날씨에 오늘도 또 흐린 건 아닐까 속상해했는데 날이 갠 것부터 이 여행이 만족스러웠다. 다시 구시가지 밖의 버스 터미널까지 걸어가며 만난 하얀 건물이 줄지어진 골목에서 우리만의 세상처럼 사진도 찍고, 여유란 여유는 다 부렸다. 이 마을에서 여행에서의 달콤한 여유의 매력에 대해 배우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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