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에서 세비야로 가는 길
포르투갈에서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날. 세비야로 가는 날이다. 리스본에서 세비야까지 비행기로 1시간이면 가지만, 편하게 비행기만 타고 가는 것보다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경험은 다 하면서 많은 썰이 담긴 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에 야간 버스를 타기로 했다. 체력만 괜찮다면, 효율성을 고려했을 때도 자는 시간에 이동하는 것이니 나쁘지 않은 수단이다.
세비야 야간 버스 탑승 Info.
리스본에서 세비야로 가는 야간 버스는 ALSA버스다. 국경을 넘어가는 먼 거리 이동이라 가지 못하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웹 또는 앱으로 구매하기를 권장한다. (2019년 기준 인당 31유로). 리스본에서 출발은 sete rios, oriente 역 두 곳이고, sete rios가 출발지이기 때문에 대체로 이곳에서 탄다. 우리 역시 sete rios 역에서 탔고, 에보라 갈 때도 왔던 근처의 rede expressos 터미널로 가서 타면 된다. ALSA 버스는 다른 회사라서 그런 건지, 국제선이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안내판에 해당 버스는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반드시 물어보길 바란다. 해당 버스 탑승장 번호 및 변동 시간 등 자세한 안내를 해 줄 것이다.
해가 지면서 할 일도 많지 않고, 혹여나 버스를 놓칠까 봐 버스 터미널에 여유롭게 왔다. 우리의 탑승장 번호는 14번. 안내받은 해당 탑승장 번호 앞 벤치에 앉아 우리가 탈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로지 오가는 버스와 사람만이 존재하는 터미널. 벤치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사람 구경과 대화였다. 와중에 한국인처럼 보이는 분이 내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 일행은 또 어디 있는 걸까,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쌓여갈 때쯤, 엄마도 그분이 눈에 띄었는지 나에게 말을 꺼냈다.
"저기 저 아줌마... 혼자 왔나 봐. 진짜 그냥 평범한 아줌마 같은데."
"나도 안 그래도 저분 보고 있었는데. 일행도 없이 혼자 오셨다고?"
평범한 아줌마. 그분을 처음 봤을 때 뭔가 엄청난 이질감이 들었는데 이 말을 들으니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드라마에서 많이 표현되는 짧고 풍성한 파마머리에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관광지에서 흔히 보이는 어머니들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보통 패키지여행에서 많이 보는 활기찬 분들의 느낌도 아니었고, 배낭여행에 익숙한 노련한 여행자의 느낌도 아니었고, 그냥 조용히 자식 뒷바라지에 열중할 것 같은 느낌의 60대 이상의 어머니의 모습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어디까지나 잘못된 우리의 편견이지만, 저분이 어떤 이유로 혼자 야간 버스를 타는 곳에 왔을까, 일행에서 떨어진 걸까, 궁금증을 자아냈다.
"혼자 오셨어요?"
엄마와의 이야기는 아주머니에 대한 대화로 시작해 흐르고 흘러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새 시야에 사라지며 관심을 벗어났던 그 아주머니께서 옆 벤치에 앉았다. 우리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 한국인인 걸 알았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 대화가 시작된 김에 동행은 없는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다.
미스터리의 아주머니는 혼자 온 게 맞았다. 자식을 다 키워놓고 이제는 자유를 누려보려 먼 여정을 오셨단다. 이분이 무엇보다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던 이유는, 스마트폰이 익숙하지 않아서 종이지도에 의지하며 가는 길을 일일이 물어보며 다니는 중이라는 것 때문이다. 한 마을도 아니고, 장거리 여정에 지도라니, 방향과 내 위치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지도에도 가끔 헤매는 입장으로서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힘들어요."
평범한 동네 아주머니의 모습을 하고 계셨던 그분은, 대단하고 멋있는 분이었다. 영어를 배우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세대인 분이 어설프게라도 영어로 현지인들과 대화로 직접 부딪치며 여행을 다닌다는 사실부터 이곳에 오게 된 이유까지 모든 것이. 말로는 이제는 힘들다고 하셨지만, 이미 들은 이야기 자체로 충분히 대단하게 느껴졌다.
혹시나 버스를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일찍 온 우린 약 1시간의 기다림 끝에 버스를 드디어 만났다. 버스는 생각보다도 시설이 좋았다. 장거리 이동이기에 화장실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 정차했을 때 짐을 훔쳐가는지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짐 넣는 칸이 보이는 CCTV 화면이 앞뒤로 붙어있기까지. 내부를 찍는 CCTV도 있었다. 지금까지 못한 뭔가 많은 버스. 야간 버스를 위한 버스 같았다.
"자, 만반의 준비를 해보자."
잠을 잘 밤에 앉아서 가는 8시간이 넘는 버스 여정. 가는 내내 자면서 이동하는 것이니 시간 절약도 하는 것 같고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문제는 국내 프리미엄 버스처럼 누워서 가는 게 아닌 평범한 45인승 버스처럼 촘촘한 의자에 앉아서 간다는 거다. 그렇게 다음날 일정을 바로 소화한다면, 제대로 48시간 동안 발 뻗고 쉬지도 못하고 움직이는 셈. 돈 아끼려다가 체력도 시간도 모두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편안한 상태로 이동하기 위해 준비했다. 목에는 목베개, 발에는 발 해먹, 추위에 대비해 바람막이. 장거리 비행에 대비해 열심히 준비해 온 게 여기에도 도움이 됐다.
"벌써 도착했네. 다음에 내려. 우리 캐리어는 잘 있겠지?"
"있겠지. 무사히 잘 왔네."
휴대성이 좋은 바람을 불어넣는 목베개와, 실제 누운 듯한 편안함을 주는 발 해먹 덕에 이 장시간 이동을 무탈하게 했다. 불안감에 잠들지 못할 줄 알았던 버스에서 어느새 잠이 들었고, 중간중간 정차하는 느낌이 들 때면 혹시나 우리 짐이 사라지지는 않을까라는 불안감에 잠결에 눈을 뜨기도 했지만, 완전히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세비야에 거의 도착한 상태였다. 비가 온 날 장시간 야간 운행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 것에 대해 타기 전부터 걱정이 많았는데, 출발 전 비도 다행히 그쳤고 별 일 없이 세비야까지 왔다.
사실 야간 버스에 대한 부정적인 썰도 많아 고민을 조금 했다. 걱정이 많은 엄마와 나는 이 이야기들을 가볍게 무시할 수 없었다. 밤이라서 모두가 자고 있으니 중간에 서는 정류장에서 누가 캐리어를 훔쳐간다, 기사가 졸음운전한다는 등의 불안한 이야기들을 봤는데 어찌 안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고민하면 여행 자체를 떠나면 안 된다. 집 밖으로 나가면 굳이 야간 버스가 아니더라도 이런 위험한 일은 불가피하니까.
무엇이든 경험이 없으면 타인이 들려주는 경험을 토대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긍정적 경험을 한 이들보다 부정적 경험을 한 이들이 홧김에 인터넷에 작성한 경우가 많기도 하고, 정보를 수용하는 사람 입장에서 부정적인 것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경험할 때까지는 걱정만 한 바가지일 수밖에 없을 거다. 걱정이 많았던 이 야간 버스도 막상 경험해보고 느낀 바로는, 기사도 안전을 위해 두 명이 운행하기도 하고, 세비야 가기 전까지 한 곳만 정차하며 CCTV가 달려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체력만 된다면, 야간 버스 별 거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