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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치고 험난한 산책로

니체는 정말로 이곳에서 사색을 했을까?

by 녕로그

분명 차가 다니는 평이한 길이었다. 누군가가 니체의 산책로라며 정보를 주었을 때는. 눈앞에 당장 보이는 현실적인 것에만 반응하는 나로서는 철학과는 담을 쌓아 니체라는 인물에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그의 대표작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할 때 당시 사색에 잠겼던 곳이라길래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 판단해 걷기로 했다. 먹고, 걷기를 반복하는 대부분의 여행에서는 잘 닦인 길이라면, 좋은 풍경을 갖고 있는 길이라면,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도 한 몫했다.


니스에서 에제 가는 길 Info.

기차와 버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지만 기차의 경우에는 시간은 덜 걸리지만 결국 역에서 내려 83번 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니스 가리발디 광장에서 82번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을 택한다. 에제에 가는 길 버스 좌석은 우측을 추천한다. 기차의 경우 10분, 버스의 경우 30분 걸린다. 또한, 체력이 좋고, 등산을 좋아한다면, 기차를 타고 와 해당 글에서 소개되는 니체의 산책로를 따라 올라와도 된다.



작지만 매웠던 마을, 에제 빌리지

가리발디 광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82번 버스에 몸을 싣고 힘겹게 간 마을. 소도시 중 소도시인지라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 당연히 앉아서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버스는, 출근길 버스가 떠오르게 할 만큼 인파로 가득했고,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는 턱에 온몸에 열심히 힘을 쓰며 올라갔다.


에제 빌리지 골목


높은 절벽에 있는 작디작은 마을, 에제. 작지만 다양한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아뜰리에가 곳곳에 있고, 꼭대기에는 이국적인 열대 정원이 있는, 작지만 독특함과 예술성 모두 지니고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몇 명이 채 지나가지 못하는 골목길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에제의 모습은 바닥을 드러낼 만큼 아주 작다. 반나절이면 충분할 만큼.


선인장 정원 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을 뒤따라 마을에 입성해 줄곧 올라온 곳 끝에는 선인장 정원이 있었다. 관심은 별로 없었지만, 올라왔으니 기어코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 보았다. 골목 내에 특별하게 표시된 곳이라고는 여기뿐이었기 때문에.


선인장 정원 Info.

입장료 6유로. 여름에 입장하면 태양이 아주 강렬하니 참고.



가도 되는 길이겠지?

에제 빌리지를 둘러보고, 선인장 정원까지 보고 내려왔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니체의 산책로는 보이지 않았다. 시작점으로 돌아와 보는데도 우리가 내려온 곳으로 가는 이들만 있을 뿐, 우리와 함께 이 마을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글쎄, 버스 정류장보다 더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만 쌩쌩 달릴 것 같아 보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지도에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 니체의 산책로. 주변을 둘러보다 찾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바로 모나코로 가려했다.


"버스 오려면 2시간보다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2시간?!"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또 있나?"

에제에 버스 오는 시간은 대체 누가 정한 건지. 버스 기사님들이 모두 점심식사를 하러 간 걸까? 점심쯤 되니 조금만 기다려서 탈 수 있는 버스가 없었다. 니체의 산책로를 찾으면 산책하다 돌아와서 타기라도 할 텐데. 보이는 거라곤 식당 몇 개뿐인데 이미 점심을 먹은 상태고, 카페는 보이지 않고. 에제에서 모나코로 버스를 타고 간 후기가 많아 우리도 당연히 자연스럽게 버스를 타고 갈 거라 생각했는데 갈 곳도 없이 멍하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게 생겼다.


니체 산책로 표지판


"저기 있다!"

"식당 바로 옆이었네!"

구글맵에 기차역이 보이길래 기차역까지 도보 이동을 알아보았다. 약 7분. 몇 시간씩 걷는 우리에겐 2시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느니 한참을 구경하고 걷는 게 더 낫다. 마침 보니 길도 니체의 산책로를 지나가는 듯했고. 지도를 찾아 길을 나서니 점심을 먹었던 식당 옆 쪽에서 니체의 산책로를 표시해둔 표지판과 마주했다. 그리고 우린 아마 구글의 모함에 빠져든 게 분명하다. 발견한 표지판에는 7분이 아닌 45분이 걸릴 예정이라고 쓰여있었으니까.


에제에서 니체 산책로 표지판 찾는 법 Info.

구글맵에서 Start of Nietzsche trail 또는 Chateau Eza 호텔을 검색하고 찾아가면 된다.


"근데 사람들이 가긴 가는 거야?"

표지판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우리도 몇 번 지나갔을 만큼 외진 곳에 있는 표지판이 아닌데, 그쪽으로 향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시선이 전혀 가지 않았다. 어째서 언뜻 보이는 길도 그다지 산책로 같지도 않고.


니체 산책로 상단부


몇 번 망설이다 용기 내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분명 정보를 얻은 곳에서의 사진은 길이 넓었으니, 조금만 가다 보면 찻길도 있을 만큼 어느 정도 폭이 넓은 길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걸어도 되는 길 맞지?"

"몰라. 길이래. 근데 니체가 진짜 여기서 사색을 했다고?"

좁고 무성한 나무가 있는 곳도 있고, 어디선가 엄청나게 커다란 개가 미친 듯이 짖는 곳도 있었다. 앞뒤로 지나가는 이 한 사람도 보이지도 않고. 더 무서웠던 건, 에제 빌리지가 있던 산은 돌산이었는데, 우리는 그 돌산을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산이 그렇게 낮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어디까지 얼마나 걸어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고, 두렵고 의아함이 가득할 뿐. 혼자였으면 벌써 그 길로 돌아 나왔을 거다.


니체 산책로 상단부


한참을 돌아가야 하나 내려가야 하나 망설이던 중, 한 외국인 부부가 우리를 지나갔다. 사람이 지나가는 걸 보니 조금 안심이 됐다. 만약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이라면, 그 부부가 다시 돌아 나오면서 마주칠 거란 생각에. 아무도 모를 만큼 외딴 길도 아닌 것 같고. 그들과 더 멀어지기 전에 최대한 시야에 보일만큼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갔다.


니체 산책로 하단부


"바다다!"

1시간을 걸었을 때였을까(뭐,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산이 맞겠다.) 바다가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니체가 도대체 어디서 사색을 한 거냐는 의문만 잔뜩 품은 채로 내려오던 중 코너를 돌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바다에 잠시 쌓인 피로가 싹 사라졌다. 선인장 정원에서 봤던 바다와 같은 바다지만, 보이는 피사체며, 빛깔이며, 모든 게 다른 곳에 온 듯 다른 느낌을 주었다.


니체 산책로 하단부


틈틈이 보이는 바다 풍경을 보니, 꽤나 내려왔다. 점점 배와 같은 눈높이를 맞추러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안도감이 들고나니 바다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고, 이 길을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니체 산책로 종료지점 (시작점)


끝내, 니체의 발자취를 따라 종료지점까지 내려왔다. 니체의 산책로를 아래까지 걸어 내려와 보니, 기차역에서 올라가는 이들을 위한 표지판이 있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건 45분인데 왜 여긴 또 1시간인지. 아무튼, 이 물음표가 가득했던 길을 내려오고 나서야 우리는 2120m 길을 산책(?) 했다는 걸 알았다.


에제 빌리지 있는 산 절벽


"여기서부터 출발했으면 우리가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맞아. 초반에 바다 보면서 올라가니까."

글쎄, 반대로 산책로라고 듣고 왔는데 산을 타야 되는 현실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 내려오고 나니, 위에서 주변은 풀숲밖에 보이지 않고 인적이 드문 좁은 길에 움츠리며 이 길이 잘못된 길은 아닌지, 이상한 길은 아닌지, 여러 걱정과 고민을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여기서 차라리 올라가는 게 더 나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철학가가 사색을 했던 길이라면 생각을 정리하는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호기심을 가졌던 니체의 산책로. 복잡한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했다기보다는 그냥 삭제시켰다는 말이 더 맞겠다. 산의 상단부쯤 층이 진 돌계단들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면서 이곳에서 사색에 잠겼다면 그는 철인이지 않을까 생각을 했기 때문에.


험해서 위험한 길이라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엄마와 나 모두 체력이 좋은 편이라서 무사히 내려왔지 아니었으면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만큼 쉬운 여정은 아니다. 물론, 정보가 없는 와중에 인적이 드문 길로 오려니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도 이 당혹스러운 여정에 몫을 더했을 거다. 더불어 생각보다는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산책로도 아니고,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출발 때와는 다르게 목적은 바뀌었지만, 덕분에 인상 깊은 이야깃거리도 생겼고, 좋은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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