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스위스에 내가 식비를 줄여가며 가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선 볼 수 없는 대자연 때문이다. 엄마 역시도 그러한 이유로 가고 싶은 여행지로 스위스를 꼽았다. 그런 우리에게 융프라우는 스위스 여행의 꽃, 핵심이었다.
융프라우는 한국인이 스위스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동진항운에서 맺은 제휴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어 더 알려졌다. 물론, 한국 관광객만 많은 것은 아니다. 3000m가 넘는 산 봉우리를 편하게 기차로 오를 수 있는 만큼,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몰리는 유명한 산 중 하나다.
융프라우
융프라우 Tip.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니 만큼, 어떠한 여행보다도 날씨가 중요하지 않은가. 융프라우로 올라가기 전, 스위스 날씨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Meteoswiss 앱 참고하길 바란다. 융프라우로 가는 티켓은 매우 비싸고, 융프라우로 가는 기차는 1회만 탑승 가능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날을 선택해야 한다. 산속 마을은 날씨가 좋아도 산 꼭대기는 날이 좋지 않은 경우도 많다. 날씨가 안 좋을 것을 대비해 일정 역시 여유롭게 잡는 것을 추천한다.
"오늘이야. 융프라우 가자."
운이 좋게도 융프라우 근처에 머무는 내내 날이 화창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날씨를 확인하며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을 하고 산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옷차림 Tip.
해당 여행 시기는 6월 중순. 기모 바지와 플리스 입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2000m 아래로 내려오면 덥기 때문에 여러 겹 껴입을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을 추천한다. 우리는 반팔 위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만일을 대비해 그 위에 넉넉히 걸칠 수 있는 바람막이를 더 챙겼다. 사실 눈이 있는 곳이라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대부분 날씨를 미리 확인하고 해가 쨍쨍한 날을 선택해서 올라가기 때문에 따뜻한 햇살을 받고, 그래서 체감 기온이 실제 기온보다 높은 편이다.
융프라우 가는 길
우리는 라우터브룬넨에 속소를 잡아 그곳에서 클라이네샤이덱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중간에 융프라우로 가는 산악열차를 갈아탔다. 가는 길 옆으로 소와 설산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정상으로 향했다.
융프라우행 산악 열차
마침내 도착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기차역. 이미 샤모니에서 겪어본 높이인지라 이번엔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터널 속에서 내려서인지 공기만 차가워졌을 뿐, 내가 높은 곳에 왔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뒤를 쫓아 차분하게 한 걸음씩 내딛으며 전망대로 향했다.
융프라우
적막함 속에 고요히 바람만 부는 산. 희한하다. 산은 가만히 있는데, 무언가 움직이는 걸 보고 있는 것처럼 계속 바라보게 된다. 녹아내린 눈 사이로 보이는 산세를 봐도, 누군가가 남겨놓고 간 흔적을 봐도, 스쳐 지나가는 헬기를 보아도 눈이 즐거웠다. 유럽 특유의 강한 햇살이 눈에 반사되면서 체감온도가 비교적 따뜻해 걸을만해서 눈 위를 걸어도 좋았다. 샤모니보다 비교적 많이 이곳저곳 걸어 다닌 듯하다.
얼음 궁전
이곳엔 얼음 터널과 궁전도 있다. 유럽에서 가장 긴 알레치 빙하 밑으로 조각해 일종의 전시장을 만들어두었다. 개인적으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조형물들이 놓여있는 터라, 잠깐의 즐거움을 선사할 뿐, 신기하거나 감탄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자연이 세월을 맞으며 만들어낸 모습과 인간이 단시간 내에 만들어낸 것이 주는 충격은 역시 큰 차이가 나더라.
점점 녹고 있다는 빙하 옆으로 열을 발산하고 있는 각종 기계들을 보니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최근 들어 환경 문제가 심각해진 만큼 되려 보존에 힘을 썼더라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이들에게는 새로운 발전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는 목적도 있겠지만, 이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선 결국 자연이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패러글라이더
융프라우는 샤모니처럼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혼자서 타는 전문가들이 대부분.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이 신기해 모두가 둘러싸고 출발하기를 보고 있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혼자서 나는 그 기분이 어떨까? 능숙하게 하늘을 날 준비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그저 부럽기만 했다.
융프라우에서 먹는 신라면
"라면 어디서 교환하지?"
"진짜 공짜로 줘?"
어쩌면 융프라우에서 우리의 가장 큰 목적은 신라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라면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또 산에서 먹는 건 다르지 않은가. 또, 한국의 대표적인 라면이 타국의 그 높은 산에서 판매되고 있는 사실 자체도 신기하고. 여러 이유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출발 전부터 전망대에서 맛보는 라면에 신경이 더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찾은 전망대 매점. 신라면이 가득 쌓여있는 걸 보고 놀라고, 또 사악한 가격에 한번 더 놀랐다. 그리곤 혹시나 라면을 먹고 있는 한국인이 있을까 싶어 의심을 가득 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엔 외국인들 뿐이었다. 결국, 직접 줄을 서서 티켓을 조심스레 내밀어 보았다. 그렇다. 정말 동진항운 티켓으로 공짜 교환이 가능하다.
"한국에선 먹지도 않던 걸 여기 와서 먹네."
"그러게. 근데 맛있어."
눈을 만지곤 차가워진 손이 뜨거운 컵에 닿아 사르르 녹았다. 따뜻해진 손으로 젓가락을 쥐어 먹은 라면 한 입. 이 순간만큼은 매콤함을 좋아하는 한국인이다. 오랜만에 맛보는 얼큰함. 산에 올라 먹는 라면 맛이 꿀맛이라더니, 산을 직접 타고 오르지 않아도 맛있었다. 산에서 먹는 꿀맛 같은 음식은 운동 후 먹는 사실 보단 그 풍경이 주는 맛이 큰가 보다.
융프라우 플라토 전망대
"사실 나는 샤모니보다는 별로였어."
"나도 그랬어."
"융프라우를 먼저 봤으면 달랐을까?"
지난 여행을 함께 되짚어 볼 때면, 샤모니와 융프라우를 꼭 비교하게 된다. 처음 마주한 설산인 샤모니 몽블랑과 비교하면, 큰 울림은 없었다. 우리의 공통된 의견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며칠 내로 비슷한 풍경을 연달아 봐서 그런 건지는 다시 한번 가봐야 알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샤모니보다 별로여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같은 대자연이지만, 어딘가 관광지스러웠달까. 풍경을 마주하자마자 멍해진 그 감정을 융프라우에선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신라면의 추억이 있다는 게 우리에겐 소중하고 특별하다. 49일 장기여행 속에서 단비 같은 한식이기도 했고, 라면에 큰 관심이 없던 우리로서는 절대 스스로 준비해서 먹을 일은 없었기에 더욱더. 그저 덕분에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 하나 있어 좋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