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 쓰고 스위스 패스 뽕 뽑기라고 읽는다
융프라우를 가는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구매했을 스위스 VIP 패스. 융프라우를 제외한 모든 열차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이외의 할인혜택이 굉장히 많은, 무적패스 같은 아이다. 이 티켓 자체도 꽤나 비싸지만, 그보다 더한 스위스 물가 앞에선 짧은 일정이 아닌 이상 더는 선택권이 없다.
우린 이왕 이렇게 된 거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산을 더 느낄 수 있도록 숙소도 인터라켄이 아닌 라우터브루넨에 잡았고,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높은 산이 많은 스위스 답게 여러 마을과 전망대가 접근성이 좋아 어떠한 선택지를 골라도 쉽게 방문할 수 있기에, 약 3일의 방문도 턱없이 짧게 느껴졌다.
1) 융프라우로 가는 길목의 산골마을,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
산과 잘 어울리는 목조 건물 '샬레'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마을. 전통가옥도 스위스 국기도 이보다 더 자연과 어울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완벽히 조화를 이뤘다. 융프라우에 가는 길목 중 하나이기에 관광객이 늘 많이 들르는 곳이지만, 실제로 머무는 사람은 인터라켄 보다 훨씬 적기에 여유로운 마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라우터브루넨은 폭포가 70여 개 있는 폭포의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건, 슈타우프바흐 폭포다. 마을 중간에 큰 낙차를 보여 유독 눈에 띈다. 광활한 자연에 비해 이 좁은 폭의 물줄기는 어찌보면 별거 아니겠지만, 이것 하나로 충분히 마을이 개성 있어졌다.
폭포가 역에서 멀지도 않아 우린 이 근처로 숙소를 잡았다. 조식 먹을 때마다 바라보는 폭포가 어찌나 반갑던지. 늘 창가에 붙어 앉아 폭포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전체적인 느낌은 장난감 마을 같았다. 멀리 띄엄띄엄 놓여있는 작은 집들과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작디작은 노란 열차. 거리가 있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이 목가적인 풍경이 비현실적이고 아기자기해서.
산속 마을에 보통 숙소를 잡으면 그린델발트로 많이 가는데, 우린 비교적 더 한적한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산은 마을에 비해 시원한 편이라 샬레마다 에어컨이 있는 경우가 드물어서 하이킹 후엔 힘들었지만.
2)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전망대, 멘리헨(Maenlichenn)
융프라우에서 돌아오는 길 중간지점을 하이킹을 하고 내려온 터라 벵엔에 바로 도착했다. 라우터브루넨보다는 조금 더 빌딩이 많았다. 건물 크기 자체도 더 커진 느낌이고.
융프라우로 올라가기 위한 마지막 기차를 갈아타는 곳인 만큼 꽤나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 몇 없는 상점에는 물건을 둘러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곳저곳 둘러볼까 했지만, 한참 고도가 높은 산에서 걷다 1000m 지점으로 내려오니 이 높이는 우리에게 너무 더웠다. 그늘 없이는 다닐 수 없는 더위에 곧장 멘리헨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해발고도 약 2000m의 멘리헨. 1000m가 더해지니 다시 시원해졌다. 6월의 이곳은 눈 때문에 추워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번 2000m 이상의 시원한 공기를 맛보고 나면 마을로 돌아가기 싫어질 만큼 더웠다. 어떤 면에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니까.
멘리헨의 경치는 말로 표현할 필요 없이 아름다웠다.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에 둘러싸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선명하게 눈앞에 보이는 설산과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벵엔의 조합. 적절하게 시원한 공기와 햇빛까지. 이 산을 즐기기 위한 최고의 전망대이지 않을까 싶다.
관광객이 다른 전망대에 비해 적어 한적해 조용히 전망을 즐기기에 최적화되었다. 멋진 경관을 가졌다며 붙은 이름에 비해 명성이 낮은 듯했다. 관광객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그들이 매력을 못 느껴서였을까?
왕관 모양까지 가는 이 길을 '로얄워크'라고 부른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붙은 이름이란다. 거리가 꽤 되어보이지만, 케이블카와 산악열차에 의존해 다니는 이 정도 거리는 걸어야하지 않는가.
"가만히 좀 있어봐!"
사실 나는 마음 편히 이 길을 즐기지는 못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걸어 올라가고, 급하게 둘러보고 내려왔다. 벌이 왕관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준 덕에. 귓가에 계속 맴도는 윙윙 대는 소리가 나를 미치게 했다. 사진을 찍어도 하도 움찔거리니 엄마가 보다 못해 한 소리 했다.
한쪽 귀를 막은 채 풍경 감상하며 천천히 올라오는 엄마도 두고 먼저 올라가버린 로얄워크. 얼굴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로 있었지만, 마음은 달랐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 화가 날 수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만이 있는 맑은 날, 이 로얄워크를 즐길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3) 인터라켄을 내려다보는 전망대, 하더쿨룸(Harder Kulm)
유일하게 인터라켄을 기준으로 융프라우에서 반대에 위치한 전망대다. 다른 곳과 마을을 끼고 조금 떨어져 있다고 생각을 해서인지 시간이 애매한 걸 알면서도 굳이 가고 싶었다. 티켓은 이미 손에 있기도 하고. 이번엔 트레킹을 하는 것도 아니니 남은 체력을 모두 끌어모아 열차를 타고 왔다.
하더쿨룸의 핵심은 인터라켄 시내와 툰, 브리엔츠 두 호수를 바라보는 것으로, 확실히 다른 전망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진한 에메랄드 빛을 자랑하는 호숫물이 마을 사이로 흐르고, 그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황 지붕들. 또, 보이는 설산의 비율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산악열차에서 내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뷰포인트로 향했다. 어딘가 한편으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풍경 속에 움직이는 패러글라이더의 모습들이 잔잔하게 융프라우 여행을 정리하기에 꽤나 좋은 풍경이었다.
이 전망대 앞의 식당에서는 알프호른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한참 구경하다 인터라켄 시내도 잠깐 둘러볼까 싶어 자리를 떴다.
처음으로 산에서 조난당할 뻔했다. 산을 타고 오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을 해서인지, 열차가 고장났는데 오도 가도 못하는 일이 생겼다. 주변에서는 낮은 산이라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오르고 내려갈 곳은 아닌데 너무나도 쉽게 산속에 갇혀버렸다는 게 조금은 어이없었다. 그런 와중에 안내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걸어 내려가면 1시간 30분 정도 걸려요. 갈 사람은 옆으로 내려가세요."
방법을 몰라서 그곳에 있었을까.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에 짧은 시간이라도 산속에 무작정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인터라켄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열차 시간이 임박해오고 있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걸어 내려가는 일을 선택할 순 없어 산악 열차 옆 계단에 털썩 앉아버렸다.
"도와주는 사람이 올 거예요."
직원이 갑자기 누군가가 온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오가지도 못하는 와중에 누군가 도와주러 온다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작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헬기가 나타났다. 우리를 태우고 가려나? 사람이 저기서 내려오려나? 그 순간, 어떤 장비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기대와는 달리 물건만 달랑 내려주고 가는 헬기를 바라보며 허황된 마음만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앞쪽에서 환호를 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해결된 것. 이내 열차를 탈 수 있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사과의 의미로 쿠폰을 하나씩 나눠줬지만, 우리는 라우터브루넨 행 막차가 떠나기 직전이라 읽을 시간조차 없었다. 호수를 즐기다 숙소로 돌아가려 했던 달콤한 꿈은 이미 떠난 지 오래다. 바삐 발걸음을 옮겨 무사히 숙소로 돌아갔다.
여행은 언제나 순탄하게 풀리지 않는다. 탄탄대로처럼 너무 여행이 잘 흘러가도 나중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딘가 모난 한 구석이 괴롭히고,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겪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우는 그 과정 또한 여행의 매력이다.
비슷한 듯 다른 듯
사전 조사를 할 땐 이 산이 저 산 같고, 이 마을이 저 마을 같고, 어찌해야 할지 감을 못 잡겠어서 숙소와 기간만 잡았다. 한 사람이 경험해 본 지역에 따라, 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추천이 바뀌기 쉬운 편이라 누군가가 추천을 해줘도 쉽게 고를 수 없었다. 사실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각각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진 큰 기대가 없었다. 손에 쥐고 있는 스위스 VIP 패스를 100% 활용하고자 갔던 것이 더 컸다.
확실한 다름을 보고 싶다면 구석구석 꼼꼼하게 천천히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볍게 그곳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껴보아도 어느 정도 차이가 느껴졌다. 같은 산이 배경으로 계속 보여도, 산과의 거리, 산의 분위기가 전체적인 느낌을 결정하기에, 각각의 개성은 어느 정도 있었다.